하느님의 종, 시대의 양심, 그리고 혜화동 할아버지. 어떻게 부르든 김수환 추기경의 87년 생은 오롯이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웃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남보다 특별하기보다 남보다 순수했다. 지난해 8월 '동성중고교 개교 100주년전'에 내 놓은 자화상의 제목은 '바보야'였다.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음력) 대구 남산동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조부 때의 일인데, 조부 김보현(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했다. 가난 탓에 경북 선산, 군위 등에서 자주 이사하며 자랐다.
보통학교 5학년을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 동성상업학교 을조(신학교 과정)에 진학했다. 지학순(1921~1993), 김재덕(1920~1988) 주교 등과 동기였는데, 추기경은 공부가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훗날 추기경은 "내가 동기 중 가장 먼저 주교직에 오르자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리라'는 마테오복음 구절을 얘기하며 함께 웃었다"고 회고했다.
1941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3년 후 학병으로 강제 징집돼 나가노(長野) 부근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종전 후 조치(上智)대 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한 여인의 청혼에 흔들리기도 했다. 1947년 신학교로 돌아오지만 몇 해 뒤 한국전쟁을 맞았다. 1951년 9월 15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던 고인은 서품식날의 기도를 이렇게 기억했다.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추기경은 대구교구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에서의 초임 시골 신부 시절을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평생 기억했다. 그러나 소박하고 평온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성의여상 교장, 가톨릭시보사 사장 등의 직책을 거쳐야 했고, 1966년 주교 서품을 받고 마산 교구장이 된 뒤로는 본격적인 '공인 김수환'의 삶이 시작됐다. 1968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 자격으로 강화도 심도직물사건에 개입하는데, 이는 한국 교회가 예민한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한 첫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같은 해 5월,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다. 주교 서품 후 2년 만이었다. 젊은 시골 주교가 한국 교회의 수장이 됐다는 소식은, 누구보다 추기경 자신에게 충격이었다. 그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라고 그 충격을 표현했다. 그러나 진짜 날벼락은 이듬해 떨어졌다. 1969년 교황은 47세의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1970, 80년대 젊은 추기경의 목소리는 곧 시대 양심의 목소리였다. 그의 두 다리는 늘 인권ㆍ민주화ㆍ사회정의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교회가 왜 정치에 개입하느냐'는 압박이 만만치 않았다. '정치를 좋아해 정의구현사제단을 조종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뇌가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이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헌장을 매일같이 되뇌이며 버텨야 했다. 그 '버팀'은 5공화국과 6월 항쟁을 거치면서도 계속됐다.
1990년대 들어 추기경의 목소리는 온유해졌다. 말년의 추기경은 화합과 용서를 부쩍 강조했다. 이런 추기경을 두고 '보수화'라는 말을 입에 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1998년 76세의 나이로 서울대교구장 직에서 퇴임하면서 추기경이 스스로에게 매긴 점수는 "약 60점 정도"였다. 은퇴하며 남긴 바람은 "운전면허를 따서 삼천리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는, 참으로 소박한 것이었다. 삶의 황혼에서 추기경은 종종 이런 아쉬움을 얘기했다.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습니다. 좀 더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했었는데…."
유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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