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의 시를 줄줄 외우던 시인, 어린애처럼 천진한 할아버지, 세뱃돈 1만원을 쥐어주던 따뜻한 손길.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 고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다. 김 추기경에 대한 개인적 추억을 간직한 우리 사회 각계 인사들은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던 그의 생전 모습을 떠올렸다.
시인 김지하씨는 김 추기경이 결혼식 주례를 섰을 만큼 인연이 각별하다. 김씨가 김 추기경을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가톨릭계 잡지 '창조'에 자신의 정치풍자시 '비어(蜚語)'가 실린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일로 잡지가 압수되고 주간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난 후 김 추기경은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에 연금된 김씨를 찾아갔다.
김 추기경은 2004년 출간된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에서 그 이유를 "처음에는 욕설투성이 시가 내 이름으로 발행되는 잡지에 실린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시를 다시 훑어보니 김지하를 직접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추기경>
두 사람의 대화는 가톨릭의 정치 참여에 대한 토론 등으로 밤늦도록 이어졌다. 김씨는 "추기경님이 나 못지않은 야행성이시라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추기경님은 보들레르의 시를 줄줄 외울 정도의 시인이시고 아주 큰 예술가셨다"고 첫 만남을 회고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7일 고인의 빈소를 찾아 1983년 전두환 정권에 맞서 단식투쟁을 할 때 자신을 말리던 김 추기경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23일간 죽을 각오로 단식을 했는데 그때 찾아와 강하게 만류하셨습니다. '그대의 몸이 상하면 누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는가. 살아야 한다'는 설득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23일간의 단식을 끝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날 빈소에서 야당 때부터 대통령 때까지 줄곧 김 추기경으로부터 가르침과 의견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진주, 청주 교도소에 투옥됐을 때 직접 면회를 오셨고, 아내(이희호 여사)에게 100만원씩 두 번의 차입금도 주신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1970년께부터 동성고 선배인 김 추기경과 꾸준히 교류했다는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은 세뱃돈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했다. 김 추기경은 매년 세배를 하러 오는 고교 동문들에게 5,000원을 주곤 했는데 2000년께부터 1만원으로 올랐다는 것. "이유를 여쭈자 추기경님은 '최근 물가가 너무 올랐기 때문'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서민들의 고통을 걱정하셨습니다."
1990년대 후반 비서로 김 추기경을 가까이 모신 최성우 신부는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리더"로 고인을 기억했다. 최 신부는 김 추기경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아름다운 리더십'이라는 글에서 김 추기경의 애창곡을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향수'와 대중가요 '애모' '만남' '사랑으로' 등이라고 소개했다. "김 추기경께서 방문하는 본당마다 노래를 해달라고 졸랐다. 어른을 초청해 놓고 어른에게 재롱을 떨라고 하는 모양새인데도 추기경님은 불러 주신다. 어떤 때는 앙코르도 하셨다."
가수 인순이는 김 추기경이 특별히 아꼈던 사람이었다. 고인은 인순이의 삶의 아픔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7일 빈소를 찾은 인순이는 "뵐 때마다 내 등을 두드려주시며 '열심히 잘 살아왔다. 세실리아(인순이의 세례명) 예쁘다'고 말씀해주셨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2004년 김 추기경 회고록에 쓴 추천사에서, 발레 공연에 초청받아 처음으로 가까이서 추기경을 봤을 때 "어쩌면 저렇게 어린애처럼 천진해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 추기경님을 뵐 때마다 어릴 적 할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가까이 다가가기 싫은 것 같으면서도 좋고, 어쩐지 우쭐해지는 느낌과 큰 빽이 있는 사람과 가까이한 것 같은 든든하고 훈훈한 느낌이 어릴 때 할아버지의 밥상머리에서 받은 느낌과 비슷하다." 박완서씨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든든하고 훈훈한 할아버지의 밥상머리를 잃었다.
김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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