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에 육박하는 한파도 고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을 함께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을 막을 순 없었다. 추기경을 애도하는 데는 종교도, 나이도, 장애도, 국적도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연인과 함께,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손을 잡고, 엄마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장애인은 휠체어에 몸을 기댄 채 조문을 위해 옷깃을 여미고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조문객의 행렬은 17일 정오 무렵엔 명동성당 대성전 입구에서부터 영락교회 건너편까지 약 1.5km 정도나 이어졌고, 2시간 이상 추위를 참으며 기다려야 조문이 가능했을 정도였다. 명동성당 측에 따르면 이날 밤 12시까지 찾아온 조문객은 10만명에 육박한 것으로 추산됐다.
딸이 수녀라고 밝힌 양하진(84) 할머니는 "어릴 때 세례를 받아서 천주교 신자가 된 지 80년이 넘었다"며 "가장 존경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프지만 분명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경기 죽전에서 세 살 된 딸을 안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는 박수강(33)씨도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시던 미사 모습이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대성전 우측 앞쪽 입구로 들어간 조문객들은 제대 가운데 김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2~3m 뒤에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좌측 입구를 통해 나와 추모미사가 열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파주에서 온 정충길(55)씨는 "조문을 끝내도 마음이 허전했는데 추기경님의 생전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액자 속 추기경님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고 말했다.
뇌성마비 장애인 이강욱(32)씨는 "평소 존경하던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에서 바로 달려왔다. 추기경님은 나 같은 장애인의 마음 속에서도 언제나 살아계실 것"이라며 울먹였다. 아일랜드에서 50여년 전에 한국으로 왔다는 패트릭(한국명 천만복) 신부는 "김 추기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상징이셨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일반 조문객들 사이로 전직 대통령 등 유명 인사들의 빈소 방문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오전 11시께 이희호 여사와 함께 명동성당을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추기경은 단순히 성직자로 봉사한 것이 아니라 독재 치하에서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광야의 소리 같은 말씀을 주셨고 행동으로 옮겨 도와주셨다"고 애도했다.
천주교 신자인 김 전 대통령은 지팡이를 짚고 수행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시신이 안치된 대성전 유리관 앞에 서서 성호를 그으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오후 2시 김영삼 전 대통령도 빈소를 찾아 "나라의 큰 별이 졌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전 대통령은 "독재정권 시절 큰 힘이 된 분이 이렇게 가셨다니 그저 아쉬울 뿐"이라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탄압받던 이들을 위해 큰 일을 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믿음과 철학, 소신을 갖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라며 조의를 표했고, 김형오 국회의장은 "역사의 고비마다 민족의 양심을 일깨우신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셨다"고 기렸다. 오후 4시께 조문한 고건 전 총리는 "우리나라에선 드물게 종교를 초월해 온 국민에게 추앙받은 국가적인 지도자이셨다"며 "그분의 큰 뜻이 계속 이어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오후 5시께 빈소에 온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해 말 통화를 했는데 그분은 나라 걱정뿐이셨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힘써 달라 당부도 하셨는데 그것이 유언이 될지는 몰랐다"고 애통해 했다.
종교계의 애도 전문과 빈소 방문도 이어졌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오전 10시40분께 총무원 집행부 스님 10여명과 함께 빈소를 찾아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살아오신 분의 선종을 애도한다"며 "천주교인들의 슬픔을 함께하며 고인의 평생 지표가 실현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모든 천주교 신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는 내용의 추모문을 내고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서 이 땅에 평화와 정의를 세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고 추모했다.
천도교 중앙본부도 애도문을 통해 "한평생 국가와 민족의 평안을 위해 헌신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환원하심을 진심으로 애도합니다"라고 밝혔다. 오후 2시30분께 교인 20여명과 함께 빈소를 찾은 이성택 원불교 교정원장은 "어느 시대나 시대정신이 있다. 선종하신 김 추기경은 한국의 격변기의 시대정신을 대변한 분이고 이웃 종교로서 애도의 뜻을 전하러 왔다"고 말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은 사장단 27명과 함께 명동성당을 찾아와 "불교를 믿는데 남의 종교도 중요하기에 조문을 왔다"며 "경제도 어려운데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 떠나셔서 애통하다"고 말했다. 어뻤?전 경찰청장도 빈소를 방문해 "좋은 말씀을 주시며 바른 공직생활로 인도해주신 분"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한편 명동성당측은 김 추기경이 생전에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된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김수환추기경장례위원회 홍보담당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께서는 유신 선포 이전인 1970년 8월 15일에 이 훈장을 이미 받았고, 유인촌 문화부장관이 국민의 사랑의 표시로 다시 제작해 전달한 것"이라고 말했다.
양홍주기자 장재용기자 김성환기자 강주형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