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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기자의 Cine Mania] '막장'이 대세라고? 고전의 힘은 강하다

입력
2009.02.19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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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자를 유혹한다. 정부(情婦)의 사악한 꼬드김에 넘어간 남자는 새로운 삶을 꿈꾸고, 일편단심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아내를 물가로 유인해 죽이려 한다. 요즘 '막장의 극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중인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도입부 아니냐고?

무성영화시대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1927년작 '선라이즈'는 '아내의 유혹'과 판박이나 다름없는 이야기 얼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방향과 전개 방식은 결이 전혀 다르다. 같은 소재에서도 '막장'과 '명작'이 각각 태어날수 있음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 독일영화를 대표하는 F W 무르나우의 할리우드 진출작인 '선라이즈'는 한 남자의 비뚤어진 애정행각이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나 화려한 도시의 삶과 전원의 순수한 일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덧없는 욕망과 당시 시대상까지 들춰낸다. 말초적인 언어와 극단적인 상황 설정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데 집중할 뿐 사회현상에 대한 조명도, 삶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도 없는 '아내의 유혹'을 비교대상으로 삼기조차 조심스럽다. 왜 고전이 시간 속에 묻히지 않고 사람들에게 계속 복기되는지 '선라이즈'는 스스로 웅변하고 있다.

'선라이즈'와 함께 최근 제4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ㆍ1910~1998) 감독의 '란'(1985)도 고전의 변치 않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한때 슬럼프를 겪으며 자살까지 시도했던 구로사와 감독이 재기에 성공한 후 만든 필생의 대작인 '란'은 20여년 전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장대한 영상을 연출한다. 수백 필의 말이 대지를 내달리고, 일본의 국보급 성들이 불타오르는 장면은 최근 개봉한 '적벽대전2:최후의 결전'의 규모를 무색케 한다.

특히 인간 삶의 운명론적 비극과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론적 시각은 구로사와의 인장을 뚜렷이 드러내며 고전으로서 가치를 더한다. "모두들 불황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란'을 보면서 구로사와의 기를 받아갔으면 좋겠다"며 이 영화를 추천한 변영주 감독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막장'이 대세인 TV드라마 대신 고전영화 한 편으로 삶의 원기를 되찾는 것도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는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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