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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마른 강원 태백·정선/ "변기물 못 내리고 설거지도 제대로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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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마른 강원 태백·정선/ "변기물 못 내리고 설거지도 제대로 못해"

입력
2009.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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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후 해발 650m 언덕에 자리한 강원 태백시 철암동 삼방마을. 메마른 공기에 금세 콧속이 마르고 피부가 당겼다. 한 노파가 작은 손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수레엔 200m쯤 아래 언덕길 어귀의 물탱크에서 물을 채운 페트병 5개가 실려 있었다. "한 달 째 물이 안 나와. 이렇게 심한 가뭄은 난생 처음이야." 할머니는 아픈 무릎을 짚고 선 채 깊게 한숨 지었다.

상수도가 끊긴 이 마을 50여 가구는 시에서 설치한 3톤짜리 물탱크에 식수와 생활 용수를 의존하고 있다. 급기야 20년 넘게 버려져 있던 동네 우물까지 깨웠다. 반장 박옥녀(57)씨는 "견디다 못해 설 직전에 돈을 걷어 우물 안을 청소하고 도르레를 설치했다"며 "먹을 만한 물이 아니라지만 가릴 처지가 못된다"고 말했다.

인근 산골마을인 피내골 역시 지대가 높아 수돗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도내 8개 지역(1,604세대) 중 하나다. 주민 한광수(85)씨는 "요즘은 물탱크가 설치돼서 숨통이 트였지만, 1월엔 계곡물을 받으러 언덕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고 말했다.

먹을 물도 부족하다 보니 재래식 화장실이 뜻밖에 효자 노릇을 한다. 고청자(65)씨는 "수세식으로 화장실을 바꾼 이웃들은 용변 볼 데가 없어 곤욕을 치르고, 윗동네 사람들은 야외에서 볼 일을 본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상수도 사정이 나은 지역도 태백시의 제한급수로 하루 3시간밖에 물을 못쓰는 생활을 한 달째 이어가고 있다. 황지동 청록아파트에 사는 남달우(15)군은 "오전 8시쯤 물이 나오니까 서둘러 씻어도 학교에 지각하기 일쑤"라며 "엄마도 국 대신 물이 덜 드는 나물 위주로 상을 차린다"고 말했다.

철암동 주공아파트의 한 주민은 "하루 15분씩 네 번만 수돗물이 나온다. 빨래는 2시간쯤 물을 주는 일요일 낮에 일주일치를 몰아서 해야 한다"고 푸념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위생 걱정이 앞섰다. 김수진(34)씨는 "지난달 열흘쯤 수도가 끊겨 물차에서 나눠주는 물로만 살았는데, 빨래는커녕 유치원 다니는 딸의 도시락 설겆이도 제대로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뭄이 하루이틀 문제도 아닌데 왜 미리부터 대책을 세우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길바닥에서 물기를 찾을 수 없는 장성동 장성시장. 상인들은 초유의 가뭄 사태로 인한 고충을 줄줄 쏟아냈다. 복집을 운영하는 채승희(55)씨는 "가뭄에 물이 지저분해졌다는 생각 때문에 불황으로 가뜩이나 줄어든 손님이 더 줄어 장사를 못할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세탁소를 하는 김민자(49)씨는 "이른 아침에 두 시간쯤 나오는 물이 전부여서 이불 빨래 같은 건 아예 맡지 못한다"고 했다. 시장 내 목욕탕 두 곳 중 지하수 시설이 없는 쪽은 문을 닫았다.

강원 남부(태백 정선 삼척 영월 동해)의 상수도 공급원인 광동댐의 저수량이 3월 중순이면 바닥날 것이라는 소식은 주민들은 더욱 심란하게 한다. 저수율이 22%까지 떨어진 광동댐은 현재 저수위(현 시설로 취수 가능한 최저 수위)를 1.3m 가량 남겨둔 상태다.

수자원공사 태백권관리단은 비상책으로 저수위 아래에 고여있는 물을 펌프로 뽑아 공급할 채비를 하고 있다. 사수(死水)로 불리는 이 물을 용수로 공급하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 하지만 수질이 검증되지 않은데다 그마저도 40일치 사용량에 불과하다.

물이 말라 자갈 바닥이 드러난 하천 옆으로 급수차가 부지런히 오가는 38번 국도를 타고 사북으로 이동했다. 정선군의 사북읍ㆍ고한읍은 태백시와 더불어 급수 사정이 가장 열악한 곳이다.

사북읍에서 상수도가 끊겨 비상급수에 의존하는 곳은 10개 마을, 241세대에 이른다. 지역 경제의 중심인 하이원리조트와 강원랜드도 스키 시즌인데도 숙박시설 내 사우나를 폐쇄하거나 시간제로 운영하고 있다. 급기야 주민들은 이날 오전 상평공원에 모여 기우제를 올렸다.

제한급수 지역인 사북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아주머니는 "수돗물이 나오는 새벽 5시에 맞춰 일어나 집에서 쓸 물을 받아놓자마자 식당으로 달려온다"며 "먹고 살려면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시장 상인은 "하늘의 일인 만큼 느긋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물이랑 불하고는 원수 질 수가 없다잖아요."

태백·정선=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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