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밑부분이 까매졌다. 태백과 정선 땅 이곳 저곳 막장의 흔적을 좇을 때 달라붙은 비가(悲歌)의 부스러기들이다.
애초에 태백 고원을 찾아간 이유는 탄광촌이 아니었다. 1월 내내 눈에 목말라 했지만 겨울의 끝물인 이제는 제법 설원 풍경을 품고있으려니 하는 기대감에, 또 지난 주말 폭설 소식도 있고 해서 찾아간 길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기온에 바닥의 눈들은 그새 죄다 녹고 증발해버렸다. 땅거죽과 헐벗은 나무들은 여전히 온통 메마른 잿빛이었다.
그 을씨년스러움 때문이었을까. 눈풍경에 대한 기대는 흰색 스펙트럼의 정반대인 블랙으로 촉수를 뻗었다. 지독한 가뭄의 겨울, 흰 눈으로 덮지 못한 처연하고 고단한 생의 현장 속으로.
고한 삼탄 정암광업소와 만항마을
정선 고한읍의 만항재(해발 1,330m)는 차로 넘을 수 있는 고개 중 가장 높다. 첩첩산중 오지인 이곳에 길이 뚫린 건 검은 노다지 석탄 때문이었다. 고한읍에 탄광이 들어선 건 60년대. 삼천리연탄으로 유명한 삼척탄좌(삼탄)가 1962년 만항재 바로 밑 지금의 만항마을 근방에 탄광을 열었다.
만항재 주변 산자락은 온통 무수히 많은 운탄길이 거미줄처럼 얽히며 휘감았고, 광부들이 몸을 뉘는 허름한 집들로 빼곡했다. 만항의 탄이 바닥나자 삼탄은 1979년 만항재 입구에 당시로선 최신식 시설이었던 정암광업소 건물을 세웠고, 더 많은 사람을 굴 속에 들이밀며 더 많은 석탄을 캐냈다. 이곳이 문을 닫은 건 2001년. 석탄의 효용성이 떨어지면서 석탄산업합리와 조치로 폐쇄됐다.
고한읍사무소의 허락을 얻어 적멸보궁인 정암사 가는 길목에 거대한 구조물로 남아있는 광업소 건물을 찾아갔다. 광해방지사업단이 고용한 관리인 몇 명이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태백이나 문경, 보령 등지에 있는 석탄박물관이 잘 꾸며진 전시장 같다면 이곳은 아직도 탄가루가 묻어나는 생생한 탄광체험 현장이다. 방금 갱에서 나온 광부들이 몸을 씻어내던 샤워실 공간은 음침했다. 영화 속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공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불 꺼진 공간, 눈 감고 서있으니 천장의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땀에 전 검은 찌꺼기를 씻어내는 광부들이 금세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상 4층인 이 건물은 바로 수갱(수직갱도)탑과 연결됐다. 지하 수백미터까지 승강기를 타고 수직으로 내려가도록 만든 시설이다. 광부들이 그 밑에 내려가 여러 굴을 옮겨 다니며 탄을 캐고 실어 냈다.
수갱탑도 당시의 시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선로, 조종실, 광차 등이 먼지를 수북이 이고서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최동순 고한읍 번영회장은 "폐광 이후 고물상들이 몰려들어 쇠붙이들을 모두 뜯어가려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 역사를 잊을 수 없어 몸으로 막아 지켜낸 유산"이라고 했다.
수갱탑에선 아직도 모터 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갱에 가득 찬 물을 빼내는 작업 때문이다. 광부들이 수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커다란 간판은 "우리는 가정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그 속에 직장을 사랑한다"고 적고있다. 그 '나라'와 '직장', '가정'이란 묵직한 글씨의 단어들이 우리네 아버지 형님들을 시커먼 땅속으로 억지로 밀어넣은 듯했다.
태백 철암마을과 태백체험공원
지금은 겨울엔 눈을 보러, 여름엔 시원한 공기를 쐬기 위해 태백을 찾는다지만, 30~40년 전에는 석탄이 떨구는 돈을 줍기 위해 전국의 막장 인생들이 몰려들었다. 태백의 산허리 곳곳에 구멍이 뚫렸고 까만 돌덩어리들이 꺼내졌다.
50여 곳이 넘던 태백의 광업소 중 지금까지 탄을 캐고있는 곳은 장성광업소와 태백광업소뿐이다. 드라마 '에덴의 동쪽'을 찍었던 한보탄광은 지난해 말 문을 닫았다. 태백광업소의 탄은 열차역 중 국내서 가장 높은 추전역을 통해 반출되고, 장성광업소 탄은 산허리를 뚫은 터널을 통해 산자락 저편의 철암역을 통해 실려나간다.
태백 시내를 벗어나 통리로 해서 남쪽으로 차머리를 돌리면 철암이다. 이곳에 접어들면 갑자기 흑백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주위의 풍경이 색을 잃는다. 산 중턱 산더미만큼 쌓인 석탄 더미, 상점들의 빛 바랜 간판, 무너져 가는 허름한 집들. 철암은 살아있는 박제, 시간이 멈춰선 곳이다. 전형적인 탄광촌이 그대로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처음 탄광이 개발되면서 철암 마을이 만들어졌다. 1940년 무렵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묵호와 철암을 잇는 철암선이 개통됐고, 1955년에는 영주와 철암을 연결하는 영암선까지 열리면서 철암은 황금기를 맞게 된다. 시커먼 탄가루는 돈을 불렀고 그 돈은 사람을 불러 모았다. 당시 철암의 집세는 서울보다 높았다. 하지만 영화는 계속되지 않았다. 주변 탄광이 문 닫으며 한때 3만명이 흥청거리던 철암의 거리는 지금 채 4,000명이 안 되는 인구로 쓸쓸하다.
다른 지역이 빠르게 폐광의 기억을 지우고 있는데 철암역 위의 선탄장에선 아직도 산너머 장성탄광에서 채취된 뒤 터널을 통해 옮겨진 탄들을 선별, 간간이 열차에 실어 보내고 있다. 이미 문닫은 여타 탄광촌이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에 따라 카지노다 스키장이다 해서 변신하고 있는 것과 달리, 철암은 아직도 석탄 산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법의 혜택을 받지 못 하고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탄광촌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다.
얼마 전까지 철암은 읍내를 가로지른 도로의 확장 문제를 놓고 주민들간 논란이 거셌다. 도로를 확장해 개발하자는 쪽과 근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현장을 보존해 문화지대로 삼자는 쪽이 대립했다. 몇 해를 끌었던 다툼은 결국 도로를 확장하기로 결론이 났다. 지금은 보상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길가의 '퇴락한 현장'도 조만간 또 사라져갈 것이다.
태백산도립공원 입구에 있는 함태광업소도 폐광된 곳 중 하나다. 93년 문 닫은 이 탄광은 2006년 태백체험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실제 광업소 건물과 수갱을 전시시설로 가꿔놓았다. 광업소 건물 인근에 광부들이 집단 거주하던 사택들도 50년부터 70년대 까지 시대별로 복원해놓았다. 광업소 건물 안에는 광부들의 실제 작업 모습을 현실감 있게 재현해 놓았다. 고한의 삼탄 정암광업소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만 일반인이 쉽게 체험할 수 있다. 체험공원으로 조성되기 전까지 10년간 방치된 까닭에 샤워기, 탈의장 등 많은 시설물은 다시 새로 끼워놓았다고 한다. 방치됐던 시기, 건물 안에서 동네 주민들이 염소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태백체험공원 (033)550-2718
정선 함백마을과 함백역
정선 땅에서 규모가 제법 컸던 탄광은 고한의 삼탄과 사북의 동원탄좌 그리고 신동의 함백광업소였다. 탄광은 문 닫은 지 오래지만 탄광촌은 여전히 남아 삶을 이어가고 있다. 광업소의 흔적은 찾기 힘들지만, 허름한 집 뒤편의 텃밭에 가득 쌓인 연탄재가 탄광촌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듯하다.
함백선과 태백선 두 개의 철로가 마을을 관통하는 함백마을을 지나,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소나무로 유명한 두위봉을 찾아 가는 길 옆에 함백역이 있다. 1957년 3월 영월-함백을 잇는 함백선의 개통과 함께 정선군에서 첫 철도역사로 문을 연 곳이다. 함백광업소의 엄청난 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역사다.
함백의 풍요도 여느 탄광처럼 오래 가지 못했다. 93년 광업소가 문을 닫았고 함백역도 그 기능을 잃게 됐다. 허름한 역사는 열차여행 마니아들이 다섯 손가락에 꼽는 간이역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아뿔싸, 2006년 10월에 철도시설공단이 1년만 더 있으면 50년을 채울 역사적인 역사를 단지 낡았다는 이유로 주민들 몰래 허물어버렸다. 그 아둔하기 그지없는 '용감무식'한 짓거리에 주민들은 망연자실했다. 탄광은 없어졌어도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그들에게 함백역은 열차역 그 이상의 상징이었다.
주민들은 스스로 힘을 모아 다시 역사를 짓기로 했다. 그리고 2년이 흘러 지난해 11월 마침내 함백역은 옛 모습 그 모양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전의 함백역이 검은 풍요의 석탄을 날랐다면 지금의 새 함백역은 주민들의 추억과 꿈을 나르는 역이다. 주민들은 역사기록관으로 꾸민 이 함백역을 인근의 안경다리와 연계해 문화벨트화할 계획이다.
요즘 불륜과 폭력, 자살과 이혼 등 극단적인 소재를 엮어 만든 드라마들이 인기다. 그 억지 스토리 때문에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는 극들이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들과 진정 막장이 품고 있는 생의 고단함과 진솔함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인지. 막상 막장에 서서 보니 그런 드라마에 붙는 막장이란 수식은 막장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란 생각이 스쳤다.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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