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대한뉴스에서 룸펜에 대해 보도했다. 러닝셔츠 바람의 사내가 방안에서 뒹굴대다가 툇마루에 앉아 허탈하게 담배를 피워댔다. 룸펜. 어쭙잖게 영어 단어 몇 마디를 주워섬기게 된 뒤에 룸펜을 방에 있는 펜, 즉 직장을 구하지 못해 집에 있는 지성인쯤으로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내 눈에는 아버지가 딱 룸펜이었다. 아버지는 베개로 턱을 고이고 엎드려 '태양의 계절' 같은 일본 소설을 읽었다. 한 페이지는 한글, 한 페이지는 일본어로 된 교본으로 한참 뒤에나 페이지가 찢겨나간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랑과 배반, 죽음으로 이루어진, 그 당시 일본 사회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소설이었다. 아이도 있고 한 여자의 남편이기도 한 가장이 빠질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유독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은 건 아버지가 출근하는 다른 아버지들과는 달리 우리와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찰흙으로 과일 모형도 만들고 찐빵을 쪄먹기도 했다. 고무 튜브에 날 싣고 헤엄쳐 아주 먼 섬까지 갔던 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해 훅 물비린내가 끼치기도 한다. 우리는 좋았지만 구직을 하지 못하는 가장을 대신해 하루종일 종종거려야 했던 젊은 어머니는 하루하루가 고단하기만 했을 것이다. 자영업자가 무려 6만 명 감소하고 실업자 수도 점점 늘어난다. 우리집도 벌써 두 명이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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