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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벽파' 심환지에 보낸 어찰 299통 발굴/ "정조 독살 가능성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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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벽파' 심환지에 보낸 어찰 299통 발굴/ "정조 독살 가능성 적다"

입력
2009.02.11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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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2대 왕 정조(1752~1800)의 정치적 행적과 인간적 면모를 세세하게 보여주는 어찰(御札ㆍ왕의 편지) 299통이 발견됐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9일 정조가 당시 우의정이자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거두로 정조 자신의 최대 정적으로 알려져 있던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비밀 편지 299통을 발굴, 공개했다. 이 편지들은 정조의 재위(1776~1800) 말기인 1796년 8월 20일부터 사망 13일 전인 1800년 6월 15일까지 씌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조선시대 왕의 편지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이다.

임형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편지들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대부분”이라며 “긴박했던 18세기 말 정조의 통치술뿐 아니라 걸러지지 않은 인간적 모습까지 보여주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임 원장은 “임금의 사적인 일상, 문장가ㆍ학자로서의 정조의 문장 표현의 특징과 함께 조선시대 임금이 개인적 용도로 쓴 종이가 의외로 검소한 재질이라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보물급 자료”라고 설명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지난해 한 개인 소장가로부터 이 편지의 존재 사실을 알게 된 후 1년여에 걸쳐 탈초(脫草ㆍ정자체로 풀어 쓰기)와 번역 작업을 해 왔다.

편지는 심환지의 후손들에 의해 전해지다가 해방 이후 어찰첩(御札帖ㆍ편지묶음) 형태로 표구됐으며, 현재 소장가는 심환지의 후손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시아학술원측은 “소장가는 신분을 밝히길 거부했지만 조만간 공신력 있는 기관에 편지를 기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편지들은 앞부분에 “보는 즉시 불태워 버려라”는 정조의 명을 담고 있는데,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내용을 다룬 비밀 편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용은 국왕인 정조가 중신인 심환지를 상대로 국정 현안을 놓고 갈등하고, 첩보를 수집하고, 여론의 동향을 캐는 등 은밀한 통치 행위를 벌인 과정을 담고 있다.

공식적 사서(史書)가 기록하지 않았거나, 기록할 수 없었던 권력의 암투와 흑막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자료다. 편지에 무수히 등장하는 ‘此紙卽卽丙之’(즉시 불에 태워라), ‘此紙卽扯之’(즉시 찢어버려라) 같은 문구, 발굴된 편지 가운데 단 한 편도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이 편지의 희소가치를 보여준다.

이른바 ‘정조 독살설’과 관련해서도 이 편지들은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지막 편지는 정조가 죽기 13일 전에 쓴 것으로, 여기서 정조는 자신이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과 약을 쓴 내역 등을 적고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이 편지들만 놓고 봤을 때, 정조가 암살됐다는 정황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정조의 편지들은 또한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에도 큰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세력과 재위 내내 껄끄러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에 비밀 편지를 주고 받은 것으로 밝혀진 심환지는 노론 중에서도 강경한 벽파의 대표로 정조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인물이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이 편지들은 정조의 말년 탕평책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각 당파의 성격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등 다양한 연구 과제를 던져준다”고 말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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