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한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는 판결의 근거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인간의 존엄성 및 행복추구권)는 헌법 제10조를 제시했다.
'인간답게 살 권리' 뿐만 아니라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함께 보장하는 것이 우리 헌법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핵심적인 가치로 명시한 취지라고 해석한 셈이다.
재판부는 "인간은 생물학적 의미의 생명 그 자체만은 아니며, 생명 역시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의식도 없는 상태로 오로지 생명만을 유지하고 있는 '식물인간' 상태가, 경우에 따라서는 환자에게 오히려 비인간적인 처사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김씨의 경우처럼 환자가 평소에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억지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했다면 환자의 뜻에 반해 기계장치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것이 환자의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자기 결정권에 따른 연명치료 중단이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따라서 이것은 형사적으로 살인이나 자살 관여 행위의 구성 요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 대한 확대해석 및 악용을 경계했다. 이례적으로 판결 직후 낭독한 '당부의 말씀'을 통해 "판결 취지를 오해해 남용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회복에 힘쓰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의 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이 같은 문제를 아무런 기준 없이 환자나 가족, 의료진의 판단에만 맡겨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존엄사 관련 입법의 필요성을 주문했다.
이번 판결로 불필요한 생명연장 치료의 중단을 환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하는 존엄사 법제화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또 이 과정에서 존엄사 인정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예상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지난달 회복 가능성이 없고 치료가 불가능해, 연명치료가 없으면 단기간 내에 사망하게 될 말기 환자에 대해 연명치료를 보류ㆍ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존엄사법' 입법 청원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신상진 한나라당 의원은 이 청원안을 바탕으로 5일 존엄사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존엄사의 적용 범위를 '2명 이상의 의사가 말기 상태로 진단하고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는 경우'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환자의 의사(意思)와 주치의 및 의료진의 판정을 기록한 서류를 제출해야 하고, 국가의료윤리심의위원회 등이 존엄사 의사 표시의 진정성을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 각계 반응/ 의료계 "기준 제시 환영" … 종교계는 찬반 엇갈려
법원이 항소심에서도 '존엄사'를 인정한 데 대해 찬반 여론이 엇갈린 가운데, 2심 재판부가 '환자가 이미 사망과정에 진입 상태일 것' 등 일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소송을 제기한 환자 가족측 신현호 변호사는 "현재 환자의 피부가 검게 변하는 등 더 이상의 연명치료가 무의미한 상태에서 이번 판결은 당연한 결과"라고 밝혔다.
세브란스병원은 "다음 주 초 윤리위원회 검토를 거쳐 최고경영자회의에서 상고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법원이 일정한 기준을 제시한 것에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병원 관계자는 "존엄사의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항소했는데 개별 사안에만 해당하는 막연한 판결을 내린 1심에 비해 많이 진전됐다"고 말했다.
병원측 박형욱 변호사도 "의료 현장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기를 기대했는데 이번에 사전의료지시서 등을 언급하는 등 일부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평가했다.
종교계 반응은 엇갈렸다. 천주교는 1심 때처럼 신중한 가운데서도 인위적인 방법에 의한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교리에 어긋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박정우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은 "존엄사라는 용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더 이상 치료 가능성이 없는데도 과도한 치료나 기계를 통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중단될 수 있다는 게 가톨릭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반면 복음주의 교단을 제외한 기독교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박용웅 기독교교단협의회 생명윤리위원장은 "법원의 판단이 안타까울 뿐"이라며 "대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며 생명사랑운동을 계속 전개하겠다"고 말했다. 불교계는 찬반이 비슷하게 엇갈렸다.
의료계는 "명백히 회생할 수 없는 환자의 존엄사를 허용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바람직하다"며 환영했다. 특히 '의사에 의한 치료 중단의 시행' 등 의사의 진료권을 인정한 것에 만족했다.
김주경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의사의 진료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등 하루 속히 법적ㆍ제도적 후속조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재용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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