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8일 이병철 고 삼성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사업에 본격 진출하겠다는 '도쿄선언'을 발표했다. 삼성의 반도체 도전은 일본 등 선진국업체가 D램 분야에서 절대강자로 부상한 상황에서 무모한 것으로 비쳤고, 외국 언론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삼성 비서실조차 반도체 전문가였던 서울대 모 교수와 접촉, 이 회장에게 '반도체 망국론'을 진언하도록 부탁했다. 이 교수는 "한국은 자본, 기술, 시장이 없다"는 3불가(不可)론을 펴며 "반도체사업을 강행하면 삼성이 망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 회장은 "내 눈에는 돈이 보인다"며 "반도체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만 둬라"며 단호했다. 삼성은 이 회장의 도쿄선언 10개월 후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D램을 독자 개발해 일본 미국업체들을 놀라게 했다. 삼성은 그룹 역량을 반도체사업에 집중, 93년 일본 미국업체를 제치고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로 부상했다. 올해까지 17년째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최근엔 세계 최초로 40나노 DDR2D램을 개발, 경쟁국과의 기술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다. 삼성이 반도체 왕국을 건설한 것은 오너의 선견지명과 적자를 무릅쓰고 그룹 자원을 반도체사업에 쏟아부은 것이 결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삼성 반도체 신화는 오너경영, 그룹경영의 장점이 잘 드러난 대표적 케이스다. 그룹의 명운을 걸고 반도체사업에 출사표를 던진 것은 단기 실적을 중시하는 전문경영인 체제라면 불가능했다. 대주주가 위험을 감수한 채 신수종사업에 과감히 베팅하고, 그룹 캐시카우(현금창출 사업)였던 제당과 모직 물산 등 우량 계열사들이 갓 태어난 동생(반도체사업)의 우유값과 학비를 지원했기에 가능했다.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70년대 도크도 짓지 않은 상태에서 선박 주문을 받고, 자동차사업에 출사표를 던진 것도 기업가정신이 용솟음쳤기 때문이다.
▦재벌들의 최근 선전(善戰)은 불황에 찌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현대차가 올들어 미국에서 전세계 자동차업체 중 유일하게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삼성과 LG가 반도체 LCD 휴대폰에서 일본 대만업체를 제치고 글로벌 강자로 부상한 것이 대표적이다. 재벌의 오너경영과 선단식 경영은 환란의 주범으로 몰려 개혁의 대상이 됐지만, 위기를 맞아 수출 확대와 경제 회복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배구조의 정답은 없다. 재벌들의 낭보는 단기업적 지향의 전문경영인체제를 금과옥조로 여겨온 반재벌 논리가 도그마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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