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전> 준비가 한창이다. 명색이 팀장인데 팀원들보다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어서 20여 권의 이집트 관련도서를 독파하였다. 그랬더니 제법 이집트 문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 파라오를 비롯한 영웅적 인물에만 눈이 가더니 점차 피라미드, 장제전(葬祭殿)과 같은 고고학적 분야로 관심이 옮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5,000~3,000년 전의 이집트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집트>
예를 들어, 신관(神官)이었던 헤카나크트는 임대료를 걷기 위해 먼 길을 떠난 후 집안일로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젊은 후처 유텐헤브 때문에 시작된 가족간의 갈등과 막내아들 스네푸르에 대한 가족들의 은근한 홀대가 걱정되었다. 무엇보다도 나일강이 범람하기 시작하여 농사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는데, 일을 맡겨놓은 장남 메리수가 영 미덥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편지를 써서 메리수에게 당부, 또 당부를 거듭하였다. 하루 빨리 돌아가서 집안일도 돌보고, 하인들의 시중 속에 편안하게 쉬고 싶을 뿐이었다.
공사감독 네페르호테프의 양자가 된 파네브는 순탄하게 자리를 이어받을 경우 앞으로 남은 인생이 너끈히 보장될 것이었다.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특혜가 모두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그는 와베트라는 처녀를 만나 결혼을 할 예정인데, 그녀가 마음에 든 파네브는 풀밭을 찾아가는 암소처럼, 소떼를 쫓아가는 목동처럼 그녀가 자신을 따르게 할 전통적인 주문(呪文)을 외우고 다녔고, 와베트는 "머리를 반쯤 땋았을 때 내 가슴이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넘치는 바람에 머리 손질을 하다 말고 당신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라고 당시에 유행하던 연시(戀詩)를 빌어 고백하였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되고자 하였던 아모세는 다른 병사들처럼 병영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고, 눈퉁이를 야만스럽게 얻어맞았으며, 이마가 부서질 것 같은 주먹질도 당했다. 나귀처럼 빵과 물을 양 어깨에 짊어져야 했고, 고약한 맛이 나는 물을 마셨으며, 보초도 서야 했다. 그리고 전투에 나섰을 때에는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에 사지가 떨렸고 급기야 날개 꺾인 새처럼 힘이 쫙 빠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힘든 병사시절을 겪어내고 50년에 걸친 군 생활을 잘 마무리한 보상으로 노예 19명과 고향인 엘카브 근처의 넒은 땅을 파라오로부터 하사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파피루스나 도자기 조각, 석회암 조각, 무덤 벽에는 이집트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기록 속의 주인공들은 신화적 인물도, 뛰어난 전쟁 영웅도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규율화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때로는 아내와 자식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를 싸맸으며, 때로는 사랑의 연가를 속삭이거나 고된 병영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한 세상을 살다 갔던 것이다.
어쩌면 현재의 우리와 그렇게 닮은꼴로 살다 갔는지 정녕 놀라울 뿐이다. 결국 아무리 시간이 흐르더라도 인간은 사람 속에 섞여서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방식대로 그렇게 살다갈 뿐인데, 지금의 우리는 마치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허상을 좇아 허둥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병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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