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에서 비롯된 정치사회적 싸움의 불길이 새삼 치솟을 조짐이다. 검찰 수사결과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농성 철거민과 진압 경찰관 등 6명이 숨진 불행한 사건이 '과잉진압' 논란을 넘어 곧장 '파시즘 타도' 구호를 외치는데 이른 판국에는 애초 피할 수 없는 싸움일 것이다.
재개발 갈등 방치가 근원
그러나 이번 사태가 과연 검찰 수사로 모든 시비를 가릴 일인지 의문이다. 물론 참사의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검찰의 고유한 책무이다. 국정조사나 특검 수사는 사건 성격상 적절치 않다. 그런데도 검찰수사가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은 사태의 본질이 공권력 집행의 적정성 차원을 크게 벗어난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진상과 책임은 엄밀히 따져야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사태의 근원을 올바로 살피는 것이다.
그 근원은 우리 경제사회 체제에 도사린 계층과 이념 갈등이다. 사유재산의 재개발 이익은 소유주끼리 갖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당연한 것인지, 아니면 세입자에게도 나눠주는 것이 사회적 정의를 위하는 길인지에 관한 갈등은 그 단면일 뿐이다. 이런 사태의 근원을 진지하게 논란하기보다 당장 시비하기 좋은 경찰의 무리한 진압과 대통령의 '법질서' 드라이브를 집요하게 추궁하는 까닭에 싸움이 끝날 줄 모른다.
왜 그럴까. 어렴풋한 계층과 이념 갈등보다는 철거민의 죽음과 공권력의 비정함을 나란히 대비하는 것이 간편한 때문이다. 반대로, 농성 철거민의 폭력성과 법질서 수호를 강조하는 것이 사회 안전을 중시하는 보수계층에 어필한다. 이처럼 철거민과 공권력, 인권과 법질서, 민주와 법치 등으로 서로 견고한 벽을 쌓고 다투는 사회에서 합리적 이성과 인도적 연민, 어떤 덕목도 제대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철거민이든 경찰관이든 죽은 이들의 원혼과 유족의 비탄을 불쏘시개로 삼아, 산 자들끼리 서로를 불태울 듯 죽어라 싸우는 양상으로 흘러간다.
그 바람에 논쟁에 뛰어든 사회 구성원들도 대부분 사태의 근원은 관심이 없거나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다. 특히 싸움을 주도하는 정치사회 세력은 보수와 진보를 가림 없이 재개발의 고질적 문제를 깊이 파고 들지 않는다. 모두가 진정으로 참사를 안타까워하고 근본대책을 고민하기보다, 저마다 이기적 명분과 이익을 찾고 지키는데 몰두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와 보수세력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기득권층과 소외계층의 갈등을 새삼스레 부각시킬 이유가 없다. 야당, 그 가운데도 민주당이라고 처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 오랜 재개발 분쟁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자신들이 집권한 지난 10년 동안에도 재개발 분쟁 요인은 고스란히 쌓여왔다. 용산 참사의 발단인 상가 재개발 문제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사태의 경위와 근원을 세세히 따지기보다, 무작정 정부의 '폭압'을 욕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이번 사태는 재개발 갈등을 적절히 조정하는 기준과 절차 등에 관한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과제를 마냥 미룬 잘못에서 비롯됐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책임을 나눠져야 할 사태를 놓고 저마다 지독한 욕설을 퍼붓는데 몰두하는 것은 이기적 위선일 뿐이다. 이를 위해 농성 철거민을 '무고한 희생자'로 규정한다고 해서 시너와 화염병을 사용한 범죄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반대로 경찰이 적법한 진압을 했다고 해서 최악의 사태를 초래한 지휘책임을 피할 수 없다.
'더불어 사는 지혜' 배워야
용산 참사는 정치ㆍ경제ㆍ 사회적 요인을 두루 살펴야만 올바른 해법에 이를 수 있는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고 본다. 그 본질을 제대로 헤아리려면 건강한 민주주의, 평화로운 자본주의의 모범으로 꼽히는 서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일찍이 계층과 이념으로 갈려 유혈 충돌과 혁명을 겪은 교훈을 바탕으로 사회경제적 이익을 고루 나누는 '타협과 상생'의 전통을 일궜다. 그렇게 '더불어 사는 사회'가 체제와 개인의 안전과 평화를 위하는 길이다. 이제라도 그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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