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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방학 끝이 보이는데 휴가 못가는 우리집 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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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방학 끝이 보이는데 휴가 못가는 우리집 형편

입력
2009.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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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2학년, 여섯 살, 세 아이와 방학숙제 때문에 전쟁을 치른다. 며칠 동안 일기를 쓰지 않은 큰 딸아이와 한바탕 했다. "수아야, 너 또 일기 안 썼어? 이유가 뭐야?" "매일 생활이 똑같은데 뭘 써요? 애들은 엄마하고 영화도 보고, 눈썰매장에도 갔다 왔다는데. 난 맨날 집, 도서관, 학원만 다니니까 쓸 말도 없고 지겹다구요."

난 소리를 질렀다. "뭐? 도서관에서 읽은 책 있을 거 아냐. 그걸로 독서일기라도 쓰면 되지. 그리고 지겹다고? 네가 정말 호강에 겨워 요강에 빠지는 소릴 하는구나. 내일 당장 학원 끊어. 엄마 아빠가 돈이 남아서 학원에 보내는 줄 알아?" 내 서슬에 아이는 힘없이 "알았어요. 쓰면 되잖아요. 그리고 학원 다니기 싫다는 건 아니라구요. 엄만 내 맘도 모르면서…."하며 책상에 앉았다.

어느새 방학의 끝이 보이는데 아이 말대로 영화관 한 번 못 갔고, 가까운 공원도 춥다는 핑계로 집에서만 지냈다. '어디 가까운 곳에라도 다녀와야 하는데…'고민하면서 가계부를 펼치고 계산해 보았지만 한숨만 나올 뿐 답이 없다.

저녁상을 차리며 시어머님도 남편도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보이지만 애써 모른척했다. 밥은 싱겁고, 반찬은 왜 이리 깔깔한지…. 설거지 끝내고 우두커니 TV보는 내게 어머니께서 봉투하나를 주신다. "이게 뭐예요, 어머니?" "응, 겨울방학 휴가비다. 얼마 안되지만 우리 바다보이는 찜질방에서 하루 놀다 오자. 김밥 싸가면 되잖냐. 애들하고 같다 오자"하신다. 뛸 듯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미안해서 마음이 아팠다.

토요일이라 찜질방은 붐볐다. 큰아이와 서로 등을 밀어주며 내가 "네 등짝이 이제 엄마만 하구나. 엉덩이도 남산만 하구"했더니 아이는 "엄마, 내 등이 넓은 게 아니라 엄마가 비정상이라구요"한다. 한참을 웃다 어머님을 찾았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어지럽고 온 몸에서 기운이 쑥 빠져서 꼼짝을 못하겠구나."

어머니를 부축해 목욕탕 바닥에 눕히고 수건에 찬물을 적셔 얼굴과 몸을 닦아 드렸다. 큰아이는 계속 할머니 얼굴에 찬 수건으로 마사지를 해드리며 종달새처럼 "할머니, 괜찮아?"를 반복했다. 많이 컸네, 우리 딸. 어머님은 "사람이 이래서 자식을 낳아 키우는가 보다. 맨날 안 아프고 건강하면 자식이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되겠나?"하시며 웃으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님이 참 좋다. 시간이, 세월이 멈췄으면 좋겠다. 우리 어머님만 피해갈 수 있다면 좋겠다.

순간 글씨가 눈에 띄었다. '외부음식 절대 반입금지' 한동안 주위 눈치를 살피다 휴게실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불빛도 약하고 안성맞춤이다. 서둘러 김밥을 꺼냈다. 김밥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큰아이에게 "괜찮아. 걱정말고 먹어"했지만 자꾸 김밥이 목에 걸렸다. 이런 곳에서까지 아끼려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밖에 못해주는 상황이 싫었다.

따뜻하고 좋기만 하던 방안이 덥고 답답해졌다. 잠이 안 와 뒤척이는 아이를 살짝 안으며 "수아야, 여기 오니까 좋아?"했더니 "솔직히 답답해서 별로지만 할머니가 좋아하시니까 나도 좋아"한다. 어느새 마음의 키가 훌쩍 커버린 아이를 안으며 "엄마가 내일 집에 가서 통닭하고 피자 사줄게"했더니 "진짜?"하며 입이 귀에 걸린다.

생각해보니 내겐 감사할 일이 참 많다. 나처럼 부족함이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 이렇게 많은데, 내 욕심 때문에 보지 못하고 살았다. 내일이면 난 다시 머리에 뿔 난 외계인 엄마로 살겠지만, 오늘 밤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난 사랑 받는 엄마고, 며느리고, 아내니까.

부산 - 이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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