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 이후 부쩍 법치(法治)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경찰의 과잉진압이 참사의 직접원인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데 주로 쓰인다. 불법적 망루 농성에 대한 경찰 진압은 정당한 공권력의 행사여서, 설사 무고한 생명의 희생이라는 불의의 결과를 빚었더라도 곧바로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보수언론은 '국민감정이냐, 법치냐'를 거론하며 '법치'를 근거로 경찰 진압의 불가피성을 두둔하고, 정부도 같은 견해를 감추지 않는다.
이들의 '법치' 인식은 극히 전근대적이다. 엄정한 법 집행, 단호한 경찰권 발동이란 뜻으로나 쓴다. 엄격한 보복 형벌을 규정한 고대 함무라비 법전이나 '예외 없는 형벌 집행'을 주장한 중국 춘추전국시대 법가(法家) 사상, 서구 경찰국가의 '법치' 인식에서 맴돌고 있다.
새삼스럽게 헌법학 교과서를 뒤져보아도 그런 '법치'는 없다. '법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법치는 근대 민주주의 이래 국가권력의 발동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원리로서 기능해 왔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기본권 보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국민의 권리와 의무는 반드시 법률로써 정한다는 형식적 법치주의에 덧붙여 그 법률의 목적과 내용 또한 기본권 보장이라는 헌법 이념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는 실질적 적법절차 요구를 담은 것으로 여겨져 왔다.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원리
주권자인 국민의 시각에서 국가권력에 마주해 그 행사에 일정한 요건을 설정하려고 한 것이 교과서적 '법치'의 핵심인 것과 달리 현재 마구 거론되는 '법치'는 어디까지나 국가권력의 시각에서 국민을 바라본다. 뒤집기도 이런 뒤집기가 없다.
이렇게 전도된 '법치' 인식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의 법 감정을 뒤틀어 참된 민주주의, 법치주의의 길을 가로막는다. 용산 참사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에서 권력과 보수층이 은근히 법치를 강조한 반작용으로 '법치'라는 말은 물론이고 그 근간인 법 자체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 법은 자연스러운 연민의 감정을 정면 부정하려는 도구이며, 강자의 이익이며, 사회정의의 적일 뿐이다. 앞으로 용산 참사가 어떻게 처리되든 이런 뒤틀린 법 감정을 해소하는 것은 장기적 과제로 남을 것이다.
반면 뒤집히지 않은 진정한 '법치'라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 비록 철거민들이 불법농성을 벌였더라도, 이를 해산하려는 경찰의 진압은 적절한 범위의 행동에 머물러야 했다. 정당한 공권력의 행사조차 지나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법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불행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법치' 스스로의 운명마저 위태롭게 한 셈이다.
전도되지 않은 법치 인식은 연민과 통한다. 현실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기 쉬운 국가권력으로부터 약한 개인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담겼기 때문이다. 현재의 '연민↔법치' 대신 '연민=법치'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또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서 어진 품성인 인(仁)이 비롯한다는 점에서 법치는 어진 정치와도 이어진다. '법치냐, 인치냐'의 논쟁이 낄 자리가 없다.
세입자, 특히 상가 세입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법제 정비도 법치에 대한 기본 인식의 전환 없이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을 그 출발점으로 잡기를 권한다.
연민과 인치(仁治)와 통해
평생 올곧게 살아온 한 노인은 자신의 건물에 세 들어 장사를 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겨 보증금과 월세를 거의 올리지 않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올리자고 졸라 온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보증금이라도 시세에 맞춰 올리는 게 그 사람을 돕는 겁니다. 오랫동안 우리 건물에서 안심하고 장사를 하다 보니 보증금이 시세의 5분의 1밖에 안 돼요. 나중에 건물을 새로 짓기라도 하면 어디 가서 가게를 얻겠어요?"
언뜻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절약된 보증금으로 세입자가 얼마든지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의 자유로운 처분권을 미리 제약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노인의 유별난 고집이 대단히 착한 연민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에 값지다. 정부도 꼭 배워야 할 마음가짐이다.
황영식 특파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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