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은 ‘1㎜의 마술’이다. 화장 두께의 미세한 차이가 미녀와 추녀의 경계를 가르는 법이다.‘세안→스킨→아이크림→엣센스→(로션)→크림→자외선차단제→(메이크업베이스)→파운데이션→색조’로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이기도 하다. 종착역은 아름다움.
미(美)를 추구하는 게 어디 인간뿐이랴. 심지어 건물도 화장을 한단다. 제 손으로 못하니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터, 세상은 그들을 뭉뚱그려 ‘공간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건물 화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탓에 언뜻 아기자기한 섬세함과 각양각색의 화려함을 연상할 법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 입에선 “기본적인 생체욕구마저 앗아가는 막노동이 따로 없다”는 푸념이 잇따른다.
건물 화장을 위해 자신의 화장 욕구는 포기(?)한 공간 디자이너들을 수소문했다. 공간 디스플레이 업체 ‘SDA&S-갤러리’의 문유경 총괄팀장, 김정호 기획설계팀장, 정지은 패브릭(직물)팀장이 증언에 나섰다. 집요하게 추궁했다. 다음은 그들에 관한 속기록이다.
-대체 건물 화장이라는 게 뭔가.
김 팀장: “건물(공간)의 인상과 스타일을 살아나게 하는 작업이다.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짓고 나면 휑한 실내에 커튼 침대 이불 소파 벽걸이 화병 책, 하다못해 욕실 화장지까지 세심하게 챙겨 모던 클래식 내추럴 오리엔탈 등 지향하는 컨셉트(인간으로 치면 섹시 도발 청순 귀염 정도 되겠다)를 창조한다. 아름답게.”
-흔히 말하는 인테리어랑 달라보이지 않는데….(무식이 곧 탄로 난다)
정 팀장: “다르다. 건설의 마무리인 인테리어는 옷 입기다. 화장도 옷에 맞춰야 도드라지지 않는가. 우리는 인테리어에 맞게 욕실 비누와 옷장 안 넥타이 색깔, 책 표지 종류, 직물의 느낌까지 명확하게 고려한다. 심지어 이불 및 가구의 각도, 다양한 소품과 액세서리의 배치까지 꼼꼼하게 챙긴다. 특정 스타일을 지닌 누군가가 살고있는 느낌이 나야 한다. 화장이 얼굴을 살리듯.”
-예쁘게만 화장하면 되겠군.
김: “천만의 말씀. 소품만 보기 좋게 진열하는 게 아니라 삶(컨셉트)이 스며 나와야 한다. 가상의 주인이 드럼연주자라면 드럼에 대해 샅샅이 공부하고, 구두 수집광이라면 구두공장까지 다니면서 세상의 모든 구두를 섭렵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꾸밀 수 있다. 마치 배역을 받은 연기자처럼.”
-곧 부서질, 아무도 살지않을 모델하우스를 그렇게까지 꾸며야 하나.
문 팀장: “모델하우스가 7할(나머지는 리조트 호텔 개인주택 등)이라 많긴 하다. 아파트를 고를 때 입지나 가격만 따진다고 여기면 오산이다. 예쁜 화장은 상대를 녹이는 법, 화장이 잘되면 분양도 잘 되는 것 같다, 하하.”
정: “모델하우스에서 본 소품을 사진으로 찍어와서 사겠다는, 심지어 실제 입주 후에 모델하우스와 똑같이 꾸며달라는 고객도 있다. 그러면 내가 꾸민 공간이 영원히 사는 것이다.”
-들으니 우아하게만 느껴지는데, 뭐가 그리 고된가.
김: “숫제 노가다다. 늘 시간에 쫓기는 현장에서 며칠밤(보통 2, 3일)을 꼬박 세기 일쑤다. 앞치마 마스크 장갑으로 무장해도 공사먼지가 온몸에 쌓여 몰골이 엉망이다. 씻지도 못하니 화장을 할 수 있겠나. 도면과 실제 현장은 느낌이 달라서 건물 화장(예컨대 미묘한 색깔차이 때문에 소품 배열을 바꾸기도)을 하는데 애를 먹는다. 특히 현장이 여러 개 겹치면 기진맥진 죽을 것 같다. 일에 치여 결혼도 못했고, 집에선 포기한지 오래다.”
정: “삼복더위에 에어컨 안 틀어주는 건설회사도 있다. 제일 싫다. 현장이 외진 곳에 있으면 화장실도 없다. 모델하우스 화장실은 마무리가 덜돼 사용불가, ‘그림의 떡’이다. 난감하다.”
-힘든 일을 뭐 하러 하나, 벌이가 좋나.
정: “돈보단 열정이다. 머리 속에만 있던 것들이 아름다운 화장으로 현실이 되면 보람을 느낀다. ‘내가 해냈어.’ 그래도 늘 아쉬움이 남는데, 딴 생각할 틈 없이 새로운 공간이 기다린다. ‘이번엔 더 완벽하게 해야지’ 하는 의욕이 생기니 그만 둘 수 없다.”
문: “고객들이 가끔 감사전화를 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우리 덕분에 분양성적이 좋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도 그렇다.”
김: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 건물 화장을 통해 좋은 인상을 남긴다는 게 매력이다. 의식주 중에 우리는 주로 의식(衣食)에만 집중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건물 화장을 하는 우리는 선구자 아닌가.”
-본인들 집은 건물 화장의 진수, 결정판이겠다.
정: “(고개를 절레절레) 집에 커튼(정 팀장은 커튼 담당이다)도 없다. 일에 집중하다 보니…. 단 세팅(setting)은 확실하다. 침대는 깨끗하게 정리하고, 물건도 모델하우스 꾸미듯 각이 잡혀있다. 혼자 밥 먹을 때도 세팅한다. 아シ〉?직업병인가 봐.” 곁에 있던 김 팀장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기록은 여기까지다. 기자가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인간과 건물의 화장은 같은 듯 다르네요.” 답이 두개 돌아왔다. “섬세한 정성이 인상을 좌우하는 건 같죠”(김 팀장), “화장술이 뛰어나도 얼굴이 받쳐주지 않으면 화장이 안받듯(원판불변의 법칙) 설계가 엉망인 건물은 제아무리 분양가가 높아도 화장하기 힘들어요.”(정 팀장)
모델하우스에 구경가거든 이것저것 우악스럽게 혹은 함부로 만지지 말아야겠다. 1㎜만 흐트러져도 공간 디자이너의 날밤 샌 땀방울과 정성어린 숨결이 어긋난다. 쉽게 말해 ‘건물 화장 지워진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건물 화장의 순서(한달 남짓 걸림)
1. 현장설명회: 모델하우스 등 프로젝트 주관 건설사가 원하는 컨셉트 제시. 컨셉트는 클래식과 모던이라는 대분류 아래 내추럴 오리엔탈 빈티지 등 수많은 갈래로 나뉨. 최근엔 스칸디나비아 풍이 유행이라고
2. 컨셉트 기획회의(세안): 각 디자이너의 경험과 정보력이 녹아 든 다양한 아이디어 취합 뒤 컨셉트에 맞게 융합
3. 컨셉트보드 완성(스킨): 세미나 자료, 패션 트렌드, 관련 잡지, 시장조사 등까지 더해 도면 위에 건물 화장 연출. 계약 따내기 위한 발표 자료
4. 프리젠테이션(아이크림): 평균 7대 1의 경쟁률 뚫고 프로젝트를 따내야
5. 본 작업 개시(메이크업베이스): 공간 디자이너 6명 정도 투입. 원하는 가구 및 침대 제작을 공장에 요청, 직물 원단 선택. 인테리어업자와 컨셉트 관련 협의. 원활한 진행위해 장식능력뿐 아니라 탁월한 말솜씨도 필요
6. 세부적인 디자인(파운데이션): 컨셉트에 맞는 가구 커튼 침대 디스플레이 소품 등 최종 선택, 국내에 없으면 해외출장 가 구해옴
7. 현장 세팅(색조): 보통 2, 3일 온갖 먼지 속에서 철야. 에어컨 화장실 부재 등 작업환경도 열악. 지방 출장도 잦음. 욕실 비누의 색깔과 모양, 위치까지 세심히 고려할 정도로 컨셉트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 살아 숨쉬게 해야
배우한 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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