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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그 겨울 그리고 가을' "희미해져가는 6·25의 상흔들 촘촘하게 앨범에 담아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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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그 겨울 그리고 가을' "희미해져가는 6·25의 상흔들 촘촘하게 앨범에 담아봤어요"

입력
2009.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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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지음/현대문학 발행ㆍ356쪽ㆍ1만5,000원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많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고 많이 아팠다는 것이다. 삶의 강제가 안겨준 아픔의 흉터가 아니라면 기억이란 대체 무엇인가? 생존이란 본원적 치욕의 그때그때 상흔이 바로 기억이 아닌가?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116쪽)

원로 문학비평가 유종호(74) 전 연세대 석좌교수는 '나의 1951년' 이라는 부제를 단 회고 에세이 <그 겨울 그리고 가을> 에서 전쟁이라는 민족공동체의 충격적 경험을 씨줄로 하고 사춘기적 성장통을 겪었던 사적 체험을 날줄로 해서,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6ㆍ25의 기억들을 촘촘하게 복원해 낸다. 때는 지은이가 광목천으로 된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충주의 고향집을 떠나 피란 행렬에 합류한 1951년 초부터 피난지 청주에서 미군 보급부대의 서기로 일했던 봄과 여름, 그리고 다시 고향의 충주중학교로 돌아간 그 해 9월 무렵까지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무섭고 놀랍고 이례적인 경험이지만, 총기있고 감수성 풍부한 17세 문학소년에게 그것은 인간의 저 밑바닥과 인생의 저 깊은 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눈뜨게 해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피난민들을 받기 싫어 '이 마을엔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따위의 글귀를 마을 어귀에 붙여놓은 부락민들, 틈만 있으면 미군부대 보급품 '째비기'(빼돌리기)에 눈이 벌건 노무자들, 벼룩의 간을 빼먹듯 노무자들의 알량한 임금에 손을 대는 중간관리자들, 물건을 빼돌린 한국인 노무자들에게 가혹한 린치를 가하는 미군장교 등등. 이런 인간 군상을 무시로 만났던 그 시절에 대해 그는 "전쟁 중에는 어떠한 일도 태연히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생각함에 따라 전쟁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이 더욱 증대해갔다"고 회고한다. 세상 이치를 알게 된 씁쓸한 체험도 겹쳐진다.

가령 충주에서 원주로 가는 군용트럭을 공짜로 얻어타 좋아했던 어느 늦여름날의 기억이 그렇다. 걷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도 잠시, 출발한 지 얼마 안돼 부대에서 쓸 나무를 싣고 가자는 군인의 명령에 차에서 내려 나무를 베고 나르느라 한 나절 땀을 뺀 그는 "세상에 공것이 없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세상이라는 게 실감으로 다가왔다"고 회고한다.

후일 그를 문학도로 이끌어준 예술에 대한 원 체험의 기억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부대 점심시간에 짬을 내 찾은 청주시내의 한 지물전에서 정지용 서정주 청록파 시인들의 시가 수록된 정음사판 <현대시집> 3권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탐하듯 독파했던 일, 부대의 북상으로 고향 충주가 좀더 가깝게 다가온 어느 아침 대림산 남산 계족산 같은 고향의 낯익은 산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고향의 산을 향해 할 말이 없어라. 고향의 산은 고맙기만 하고나'라는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단가를 떠올리며 문학경험과 인생경험의 상관관계를 유추했다는 그의 기억들은 이후 한국의 평단을 이끌어간 문학평론가 유종호를 배태한 소중한 질료들이다.

메모 한 장 없이도 50여년 전 미군부대 군무원들의 직종별 급료체계 세목까지 복기해내는 저자의 놀랄 만한 기억력과 "모두들 깔깔깔 껄껄걸 낄낄낄 웃었다"는 식으로 질펀한 육담에 한껏 흥이 오른 군무원 막사의 분위기를 그려내는 생생한 표현과 묘사력은 한 편의 소설 못지않은 흥미도 자아낸다.

<그 겨울 그리고 가을> 은 그가 1941~49년 유년시절의 체험을 담은 <나의 해방 전후> (2004)의 속편 격이다. 지난해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것을 책으로 묶었다. "8ㆍ15해방과 6ㆍ25는 우리 세대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력이 있을 때 한 자라도 더 기록하겠다"는 그는 "너무 민감한 부분이라 좌우로부터 모두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다음에는 1950년의 기억을 더듬어보겠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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