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의 전(前)처리 도장 라인. 선박 주 원료인 후판(두꺼운 철판)이 굉음과 함께 대형 롤러 사이를 통과하면 금세 표면이 매끄러운 철판으로 바뀌고, 녹 방지용 페인트 분무장치를 거치면 블록(선박 부분품) 재료로 완성된다.
철판 가공은 조선소 공정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오염물질이 여기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울산조선소도 마찬가지다.
제철소에서 실어 온 철판의 녹을 벗겨낼 때 분진이 날리고, 페인트를 칠하는 과정에선 독한 냄새 탓에 두통을 유발하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질(VOC)이 배출된다. 설계도면에 따라 철판을 자르고 붙이는 과정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조선소 환경 문제가 중요시되는 이유다.
하지만 비산먼지가 풀풀 날리고, 페인트 냄새가 조선소를 뒤덮던 시절은 이제 옛말이 돼버렸다. 첨단 오염방지 시설 덕택이다. 울산조선소의 7개 전처리 도장 라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분진은 진공청소기의 필터와 유사한 형태의 집진 장치에 의해 걸러지고, 몸에 가장 해롭다는 VOC 배출량도 축열식 산화설비(RTO)가 99%나 줄여준다. 강병화 안전환경부 차장은 "기존 흡착방식과는 달리 RTO는 휘발성 물질을 섭씨 900도 이상에서 자연 발화해 없애기 때문에 추가로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은 점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옥내 도장시설 도입도 '녹색 전환'(그린 트랜스포메이션)'의 한 축이다. 과거 야외에서 도장할 때는 페인트 냄새와 유해 물질이 외부로 날리는 게 다반사였다. 때문에 장마철에는 밀려드는 선박 주문에도 불구,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식의 야외 도장 공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선박 완성품의 이음새 부분 도장을 제외하고는 페인트 작업 모두가 17개 실내 작업장에서 이뤄진다. 페인트 사용량 감소(5%) 덕분에 유해물질 발생량도 크게 줄었다.
아직 더디긴 하지만 온실가스 감축 활동도 적극적이다. 2000년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와 온실가스 감축 협약을 맺은 이후 2005년까지 선박 제작에 사용되는 연료를 기존 벙커C유와 등유에서 청정에너지인 LNG로 교체했다. 황산화물 등 대기 오염물질은 물론, 온실가스 배출량도 획기적으로 줄였다.
조선소 녹색혁명은 협력업체와도 연결돼 있다. 업계 최초로 도입한 '녹색구매제도'는 가격은 좀 비싸더라도 친환경 자재를 구입하는 것이다. 제품이 환경과 인체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자는 차원이다. 예컨대 LNG 화물창 보온재에 들어가는 재료인 기존 유해성분이 함유된 '6가 크롬' 대신 '강화 폴리우레탄폼'을 구매하는 식이다.
조선소 친환경의 핵심은 역시 선박이다. 연료 효율을 높이거나, 선박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2007년 국내 최초로 '이중연료 전기추진' LNG선을 건조했다. 필요에 따라 벙커C유와 가스를 번갈아 사용할 수 있어 기존 스팀터빈 방식보다 연료 효율이 10% 이상 높다.
여기에다 항공기 날개의 개념을 프로펠러 추진력 향상에 도입한 이른바 '날개 단' 선박은 같은 연료로 기존 선박보다 5% 이상의 연료 효율을 높였다. 대형 선박(유조선)의 경우 1년에 20억원 가량 연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부분은 선박 항해에 필수적인 '물'을 어떻게 친환경적으로 유지하느냐 여부다. 모든 선박은 화물 선적과 관계 없이 배 밑 부분이 일정 수준으로 가라앉도록 유지하는 장치를 갖고 있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물이 '밸러스트수(水)다.
화물을 실었을 때 배가 적정 수준으로 가라앉아야 프로펠러가 추진력을 제대로 발휘한다. 때문에 짐을 내린 뒤에는 무게 유지를 위해 물을 싣는데, 이 물을 다른 해양에 버리면서 생태계 파괴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실제 산호초 관광으로 유명했던 호주의 한 해변은 불가사리 등 외래 생물의 공격으로 폐허가 돼버렸다. 자국 선박이 해외에 철광석을 내린 뒤 담아온 물에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각종 미생물과 유충이 포함돼 있어서다.
박기용 산업기술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런 문제 때문에 2012년부터 제작되는 선박에는 밸러스트수를 친환경적으로 처리하는 장치가 의무적으로 장착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대중공업의 핵심 기술은 밸러스트수를 친환경적으로 처리하는 '자외선 살균 시스템'이다.
현재 밸러스트수 살균를 위해 화학약품 처리, 바닷물 전기분해, 자외선 투입 등의 방식을 쓴다. 이 중 자외선 방식은 유독가스와 발암물질이 발생하지 않아 환경피해가 가장 적다.
통상 30만톤 규모의 초대형 유조선이 10만톤(수영장 3,000개 사용규모)의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살균장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대중공업은 6월 인도되는 초대형 컨테이너선에 이 장치를 처음 장착한다.
이태범 상무(안전보건환경 담당)?"조선산업은 철강이나 화학업종보다 오염물질을 상대적으로 덜 배출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경쟁국의 조선산업에 대한 에너지 및 환경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만큼 친환경 선박 생산으로 세계 1위 조선산업의 위상을 유지하겠다"고 다짐했다.
■ 석유개발 설비 자립화 등 정부 핵심 프로젝트 추진
정부의 조선산업 녹색전략은 '2020년 청정 조선해양시대를 이끄는 글로벌 리더'로 요약된다. 우리 조선산업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1위다. 세계 10위권에 들어간 국내 조선업체가 7개 이를 정도다. 수출(276억달러)과 고용(105만명) 등을 고려할 때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 또한 절대적이다.
이런 1등 산업이 앞으로도 세계 1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환경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미 세계적으로 해양 관련 규제는 강화되고 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기름 유출 등으로 해양 생태계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단일선체 유조선의 조기 퇴출을 비롯, 밸러스트수 처리 규제와 선박 대기오염 및 온실가스 배출 규제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좋은 선박은 이제 친환경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이에 따라 미래형 친환경 선박ㆍ해양 시스템 기술개발을 핵심 프로젝트로 두고, ▲에너지 절약 및 오염물질 배출 제어 등 핵심 기술 개발 ▲초심해 석유개발을 위한 실험설비 자립화 기반 구축 ▲ 해양퇴적층에 이산화탄소 저장을 위한 해양플랜트 실용화 ▲고급 기술인력 육성 및 국제기구 규제에 대한 선제 대응 등을 중점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 그린에너지 사업 현대중공업 '잰걸음'
현대중공업을 '세계 1위의 조선소'로만 알면 오산이다. 현대중공업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조선소이기도 하지만, 어느 기업보다도 친환경 에너지에 관심이 많다.
단순히 내부 사용 목적으로 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린 에너지 시장에서 선두업체로 발돋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2005년 울산에 20MW급 태양광 모듈공장을 설립, 태양광 발전설비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유럽지역에서 6,000만달러 규모의 발전설비를 수주했다.
작년에는 충북 음성에 태양광 발전 핵심부품인 태양전지 공장(30MW 생산능력)도 완공했다. 내년에 공장을 추가 설립해 연 330MW(10만명 사용규모)급 생산능력을 확보할 예정이다. 연 1조원의 매출 달성이 가능한 수준이다.
여기에다 태양광 핵심소재인 폴리실리콘 사업도 작년 KCC와의 합작법인 설립을 통해 시작했고, 내년부터 태양광 모듈 전단계 재료인 웨이퍼 등도 생산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현대중공업은 폴리실리콘에서 잉곳ㆍ웨이퍼, 태양전지, 모듈, 발전시스템까지 태양광 발전 전 분야에 진출한 국내 최초의 기업이 될 전망이다.
또한 작년에는 군산산업단지 내 부지에 1,000억원을 들여 국내 최대의 풍력발전기 생산 공장을 설립하는 등 조선 분야와 함께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의 하나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기업으로서 에너지를 친환경적으로 축적하는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울산=박기수 기자 bless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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