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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백김치, 숨죽지 않은 배추의 아삭함 시원! 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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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백김치, 숨죽지 않은 배추의 아삭함 시원! 담백!!

입력
2009.02.06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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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낳으면, 그 자라나는 모습에 따라 친탁했느냐 외탁했느냐가 이야기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친구들이 하나 둘 부모가 되어가는 이 마당에 “우리 애는 딱 지 아빠 쪽을 닮았어.”라든가 “저 집 딸은 외갓집 성격이구만.”하는 소리들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나랑 남동생만 봐도, 서울 사람들인 외가 식구들의 세심한 성격을 꼭 빼닮은 동생과 이북사람이라 겉은 차고 속정이 있는 친가 성격을 빼다 박은 나는 닮은 듯 다른 점이 많다. 특히 나는 친가 집 첫 손녀로 내 할머니를 꼭 닮았다.

<할머니와 나>

할머니는 가끔 섭섭하다고 하신다. 내가 매체에 음식 글을 쓴 지 어언 10년인데, 할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자주 등장하면서도 어째서 할머니의 맛 이야기는 쓰지를 않느냐는 말씀.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얼굴 모양도 윤곽이 큼직한 남방계 미인형인 엄마나 이모들과 달리 전형적인 북방계 여자 얼굴인 할머니를 닮아 갸름한 편이다. 식성은 또 어떻고. 젓갈을 많이 넣지 않은 이북김치, 담백한 나물, 무를 작게 썰어 만드는 깍두기 등 소찬에 밥 한 그릇이면 된다. 우리 할머니는 지출이 적은 알뜰 주부셨다, 평생. 어릴 적에는 할아버지가 돈을 벌어다 드려도 웬만한 일에는 지갑을 열지 않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느덧 나도 ‘짠순이’ 소리를 종종 듣는 주부가 되어가고 있으니 ‘짠순이 근성’도 할머니랑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할머니랑 닮은 점이 많은 내가 어째서 원고마다 할아버지 이야기만 써왔던 걸까.

할아버지는 워낙 활달한 분이셨고,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할아버지 생전에 함께 나눴던 대화의 양이 많았다. 늘 손주들 앉혀 두고 덕담 하시기를 즐기셨던 할아버지는 나와 동생이 앞으로 살면서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는 ‘잠언’같은 말씀을 기억 속에 잔뜩 남겨 주셨다. 반면, 할머니는 말수가 적으셔서 꼭 필요한 말씀만 건네시는 분이다. 구세대 같지 않게 표현이 넘치셨던 할아버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용하신 성격 때문에 기억에 남는 강한 추억이 비교적 없는 편이다. 그런데 얌전하신 내 할머니와 가랑비에 옷 젖듯 잔잔한 순간들이 이제 막 쌓이기 시작했다.

<손녀사위와 할머니>

“ 당신은 할머님이랑 많이 닮았더라.” 나의 할머니를 처음 뵙고 돌아온 날, 남편이 했던 말이다. 어릴 적 ‘할머니 많이 닮았다’는 말 들은 이후 십 수 년 만에 그 말을 남편 될 사람에게 들었다. 내가 할머니와 많이 닮았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을 때다. 맞벌이로 바쁘셨던 시부모님을 대신하여 남편을 길러주신 시할머님이 안 계신지 벌써 15년. 할머니의 빈 자리를 와이프의 할머님으로 채웠는지, 남편은 나의 할머니를 처음부터 많이 따랐다. 그 마음을 아시는지, 할머니도 손녀사위를 많이 챙기신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벨트나 열쇠고리, 넥타이 같은 물품 가운데 젊은 분위기가 난다든지, 넥타이의 프린트가 산뜻하다든지 하는 것들을 챙겼다가 볼 때마다 쥐어 주신다. 얼마 전에는 할머니의 특제 백김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 역시 남편 덕분이었다. 젓갈을 많이 넣은 매운 김치보다 시원한 맛의 허연 김치를 좋아하는 그의 식성을 언제 아셨는지 백김치 한 통을 챙겨 주신 거였다.

우리 할머니의 백김치는 배추의 결이 살아 있다. 많이도 아니고 딱 알맞은 만큼만 절여 배추가 축 늘어지지 않고, 간도 싱겁지 않을 만큼만 하신다. 여기에 홍고추와 파로 모양을 더하여 접시에 담으면, 하얀 배추와 빨갛고 어슷 썬 고추가 어울려 예쁘다. 이북김치 특유의 차가운 맛에, 숨죽지 않은 배추의 아삭함이 입 안을 서늘하게 채워 준다. 음식이 아무리 기름져도 백김치 한 쪽이면 금방 청량한 맛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배달시킨 피자에도, 후딱 볶아 준 볶음밥에도, 계란 물을 입힌 호박전이나 굴전에도 꼭 ‘할머니 백김치’를 달라고 한다.

부지런한 내 할머니는 귤 껍질이며 고추며 틈틈이 말렸다가 손녀딸 손에 한 봉지씩 쥐어주신다. 지난 연말부터 질질 끌어 오던 감기도 할머니가 주신 귤 껍질 끓인 물을 매일 마셔서 떨어냈다. 어릴 적에는 일복 많은 맏며느리인 울 엄마에게 칭찬이 인색하신 게 아닌지 섭섭하기도 했지만, 지금 보면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는 두 사람만 아는 신뢰가 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새색시였던 엄마가 할머니 나이가 되고, 표현에 인색했던 할머니는 “네 엄마가 서울 사람인데 이북 음식을 더 잘한다.”고 하시고, 나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내가 물려받은 입맛과 모자란 손맛이 귀하디 귀한 것임을 깨닫는다.

박재은·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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