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하원의원 시절 나의 지역구에 포함돼 있던 요바 린다(Yorba Linda)라는 도시는 미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출생지다. 요바 린다는 오렌지 카운티 가장 북쪽의, 로스앤젤레스와 인접한 백인 부자 도시다. 내가 시장을 지낸 다이아몬드 시처럼 비교적 신도시로, 경찰을 따로 두기 보다는 바로 옆 브레아라는 도시의 경찰을 돈을 주고 채용했다. 다이아몬드 시도 백인 부자 도시로 비싼 경비를 들여 경찰서를 따로 두지 않고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경찰을 매년 계약을 통해 채용했다.
두 도시는 인연이 많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뒤 요바 린다 시는 닉슨기념관을 세웠고, 나는 지역구내에 있던 이 기념관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열심히 참석했다. 닉슨 대통령은 자기 출생지를 대표하는 연방 의원이 백인이 아닌 아시아계라는 데 대해 속으로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듯 했지만 겉으로는 항상 친절했다.
닉슨의 정치 이력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1946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1950년 연방 상원에 진출한지 2년 뒤 공화당 아이젠하워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돼 부통령에 당선됐다. 1960년에 대통령에 출마했지만 버락 오바마처럼 선풍적 인기를 타고 떠오른 민주당 존 F. 케네디에게 아주 근소한 차이(0.2%)로 패했다. 애송이 케네디에게 패배한 뒤에는 그 심적 타격으로 워싱턴을 떠나 다시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귀향했고, 이어 2년 뒤인 1962년 이번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출마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주 근소한 차이로 민주당 소속 브라운 지사에게 패배했다. 패배한 다음 날 아침 기자회견에서 닉슨은 “오늘 이 기자회견이 마지막” 이라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모두들 이제 닉슨의 정치생명은 끝났다고 믿었고, 언론들은 닉슨 곁을 떠나 다른 떠오르는 별을 찾아 몰려갔다.
하지만 닉슨은 자신의 발언을 스스로 깨고 6년 뒤 다시 정치에 복귀했다. 1968년 닉슨이 다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 그가 당선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닉슨에겐 운이 따랐다. 현직에 있던 36대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베트남 전쟁 때문에 완전히 만신창이가 돼 재선을 포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모두들 놀랐고, 민주당 내부는 어수선했다. 곧바로 존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민주당 경선에 뛰어 들어 인기가 혜성처럼 하늘을 찌를 즈음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민주당 진영은 이 엄청난 비극에 어쩔 줄 모르게 당황한 가운데 허버트 험프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조지 월래스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닉슨은 여유를 갖고 침착함을 보이면서, 대통령이 되면 반드시 베트남전을 끝내겠다는 약속으로 국민을 설득했다. 그리고 결국 미 합중국 3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한 지 6년만에 재기해 대통령이 된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정치에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지 6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경우는 전례가 없던 일이라며 이를 기적으로 표현했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날 부인 팻 닉슨이 격하게 울면서 닉슨을 껴안는 모습이 전국에 방영됐다
한국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경력도 닉슨과 비슷하다. 1980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세계 각국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1982년 형 집행이 정지되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7년 12월16일 제 13대 대통령에 출마했지만 노태우 후보에게 패했고, 1992년 12월 18일 다시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서는 김영삼 후보에게 패했다. 그 해 12월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 은퇴를 선언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은 1995년 정계 복귀에 나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10월에는 자민련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하고 12월 18일 제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불과 1년 전 워싱턴 근교의 식당에서 김대중씨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무척 초라해 보였다. 당시 뉴욕에서 가발상을 하던 박지원씨가 김대중씨의 가방을 들고 다니며 그림자 같이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사실 뉴욕에서 가발장사를 하면서 한인회 회장을 지낸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박지원씨가 나중에 김대중 정권의 2인자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의 중심이란 말을 듣고 정말 놀랐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된지 4개월 뒤 나는 청와대에서 그를 단독으로 만날 기회를 가졌었다. 그의 북한에 대한 지식은 놀라웠다. 내가 뭐라고 말할 때마다 그는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부지런히 적었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의 자랑이다.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아무에게나 쉽게 노벨평화상을 주는 기구가 아니다.
그런데 미국 닉슨 대통령과는 달리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이 계속됐다. 고질적인 영호남 지역 분열을 개선하지 못했다는 비난도 피할 수 없었다. 장남 김홍일 의원이 소위 ‘홍삼게이트’로 구속된 오점, 당장 남북통일이 될 것처럼 국민의 마음을 들뜨게 한 것, 그리고 반미 친북을 외치던 측근들의 우물안 개구리식 외교정책도 문제였다.
닉슨 대통령은 선거 공약대로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의 탁월한 외교술로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해 1972년 압도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처럼 한 때 영웅이던 닉슨은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연방 하원에서 탄핵을 받기 직전인 1974년 8월9일, 대통령직을 스스로 사임했다.
닉슨 대통령의 부인 팻 닉슨은 1993년 6월 22일에 사망했고, 그의 장례식은 부인의 바람대로 닉슨도서관 앞뜰에서 치러졌다. 나는 닉슨의 출생지를 대표하는 연방 하원의원 자격으로 닉슨 전 대통령 옆 세번째 자리에 앉았다. 당시 닉슨이 장례식 내내 어찌나 슬피 우는지 나도 울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평생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울어본 적이 없다던 이 강철 사나이의 슬피 우는 모습에 장례식에 참석했던 모두가 함께 울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닉슨의 측근들은 그가 부인 팻 없이는 아마1년을 더 살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부인이 사망한 지 꼭 열 달 만인 1994년 4월 22일, 미 역사의 거물 정치인 닉슨 전 대통령은 영영 쓰러졌다.
나는 지금도 부인의 장례식에서 슬피 울던 닉슨의 옆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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