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메릴린치를 만들자' '금융허브가 되려면 골드만삭스 같은 투자은행(IB)을 육성해야 한다.'
불과 1~2년 전까지 IB는 한국금융에게 '엘도라도' 같은 곳이었다. 한국금융이 선진화되려면 반드시 IB로 가야하고, 또 IB만 만들어지면 금융은 저절로 업그레이드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정부도 금융회사들도 늘 IB 얘기 뿐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1년 여의 유예기간을 거쳐 이 법이 4일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하지만 초기의 기대와 찬사와는 달리, 자통법 시대를 맞은 금융권은 너무도 조용하다. 내놓고 IB를 말하는 사람도 이젠 별로 없다.
그새 IB아닌 새로운 대안모델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 한국금융산업은 지금 이정표 자체를 잃고 헤매는 형국이다.
■ 월가 몰락이 부른 논란
IB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뚝 떨어진 이유는 미국발 금융위기에 있다. 자통법이 애초 모델로 삼았던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시스템이 뿌리 채 흔들린 탓이다.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해 온 베어스턴스와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 등 굴지의 IB들이 잇따라 간판을 내리면서 이제 'IB모델' 자체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의 IB를 꿈꿨던 한국의 금융으로선 당혹스러울 수 밖에.
IB들이 과도한 차입과 무모한 투자를 통해 화를 자초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화점이 됐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도 따지고 들어가면 IB의 작품이다. 하지만 IB시스템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뜨겁다.
한편에서는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IB 모델과 규제완화가 위기를 불렀다"며 IB 모델 자체의 폐기를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IB기업은 몰락했으나 IB역할 자체는 여전하다"며 이번 위기를 IB 혁신의 계기로 삼자고 지적한다.
경기침체 이후 회복기를 서둘러 준비해야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해외 IB의 향배를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입장이다. 정부도 법만 시행하고 업계에서 알아서 하라고 할 게 아니라 적극적 소통을 통해 시장이 공감할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 미국 IB 몰락, 진짜 원인은
지금 미국의 5대 대형 IB들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리먼브러더스는 사라졌고 베어스턴스와 메릴린치는 상업은행(CB)에 인수됐으며,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마저 은행지주회사로 모습을 바꿨다. 때문에 "IB 모델은 이제 끝났다"고 의견이 득세하는 듯 하다.
그러나 정유신 한국스탠다드차타드증권 대표는 "미국 IB들이 몰락했다고 해서 IB비즈니스 모델이 의미 없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에도 선진 IB들은 위기 때 싼값으로 투자하고 부실여신을 인수해 미래 수익과 시장을 확보했다"며 "위기는 곧 기회"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상위 5개사와는 달리, 위기에서 한발 비껴나 있는 미국의 다른 IB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보성 한국증권연구원 연구위원은 "상위 5개사는 하나같이 과도한 차입을 통해 자기투자(고유계정) 규모를 지나치게 늘렸고 고객의 이해와 상충되는 영업을 해 온 점이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전통적인 IB의 역할은 복덕방 주인과 비슷했다. 집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을 연결해 주고 복비를 받듯, IB는 증권ㆍ채권을 발행하는 회사와 투자자, 기업을 사고파는 회사들 사이에서 거래를 성사시켜주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것이 주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거대 IB들은 1990년대부터 중개인 역할보다 여기저기서 빌린 돈으로 자기장사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규제완화와 초저금리를 틈타 거래의 중개인에서 일약 주인으로 변모한 것이다.
신 위원은 "실제 2000년대 초반까지 자기자본의 20배 수준이던 상위 5개사의 부채는2007년 30배까지 늘었고 일부 회사는 전체 수익 가운데 자기장사로 70%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주로 예금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상업은행과 달리 차입에 주로 의존한 IB들은 금융위기가 오자 급속한 자금회수를 당했고, 그 결과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직접 집 사고팔기에 나선 복덕방 주인은 더 이상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자금을 투자해 얻는 짭짤한 수익에 눈이 먼 IB들은 괜찮은 알짜기업이 매각을 의뢰해 오면 매수할 기업을 찾기보다 자기가 직접 살 마음을 먹었다.
당연히 실제 가치보다 낮게 평가해 시세차익을 많이 남기려 들었고 매각을 의뢰한 기업주는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평소 그 기업을 눈여겨 봤던 잠재적인 구매자들은 'IB가 좋은 물건은 다 채 간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신 위원은 "거대 IB들의 자기자본 투자 증가와 함께, IB와 고객 간에 이해상충 관련 소송도 큰 폭으로 늘어났다"고 전했다.
■ 한국 IB 어디로 가야 하나
최근 악화일로의 우리나라 실물경제 상태를 고려하면 전문 IB의 도입은 더욱 시급하다는 지적이 높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기업에 필요한 자금을 신속히 조달한다는 IB 본연의 비즈니스모델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송경철 금융감독원 부원장은 "자통법 추진에 힘이 실릴 수 있었던 것은 혁신산업과 모험산업을 육성해 실물경제의 재도약을 도모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 때문"이라며 "보수적인 은행 중심의 기업 자금조달로는 한계가 명백하다"고 지적했다. 수익만큼 위험도 큰 사업에는 '리스크 테이킹'(위험부담)을 본질로 하는 자본시장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의 교훈으로 과도한 차입에 대한 규제는 불가피해 보인다. 우리 IB들도 자기자본보다 수십배씩 많은 투자자금을 마련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따라서 향후 IB의 모습은 기업과 투자자를 연결하는 전통적인 IB 모델에 더 가까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지나치게 단순 중개업무에만 치중하는 국내 금융투자회사와 과도한 차입경영에만 치우쳤던 해외 대형 IB의 중간 정도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전 연구원은 "미국 IB는 과도한 위험추구로 위기를 맞은 반면, 국내 대형 금융투자회사들은 지나친 위험기피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가 하루라도 빨리 신성장동력을 갖추고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전문 IB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 자본시장 감독 쉽지 않을 듯
미국 금융위기에서 보듯 금융산업을 발전시키려면 그에 걸맞은 규제감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손실 정도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무너지는 사태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시장을 감독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4일부터 시행된 자본시장통합법에서는 금융상품을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자유로운 상품 개발의 범위만큼 감독당국 입장에서는 장외 파생상품을 비롯한 어떤 상품도 규제의 그물망에 가두게 된 셈이다.
하지만 이는 그물에 들어온 모든 상품의 특성과 위험을 파악할 당국의 능력을 전제로 한 얘기다. 업무간 벽을 허무는 업무통합(기능별 규율체계)이나 불완전판매 사후식별 등 투자자보호 조치도 감독당국의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안타깝게도 당국의 역량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감독기관이 시장의 첨단기법을 따라가기엔 벅찬 측면이 있다"면서 "게다가 최근 정부 지침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감독당국 인력을 줄여야 하고 우수한 외부인재를 끌어오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감독당국의 규제가 도리어 시스템 리스크를 확대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령 투자자 보호제도가 본래 취지와는 달리, 헤지펀드나 뮤추얼펀드 운용자의 위험추구 성향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규제도 마찬가지다.
이번 위기에서도 은행으로부터 거금을 차입한 헤지펀드들이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보유 담보가치가 하락하자, 은행들이 BIS비율 하락을 막기 위해 헤지펀드를 대상으로 자금회수에 나섰고 이는 다시 헤지펀드 담보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 은행 건전성을 보장하기 위한 BIS 규제가 오히려 은행과 헤지펀드의 상호 부실을 키운 셈이다.
이 같은 피해를 한 방에 막을 묘수는 없어 보인다. 더욱 철저히 관찰하고 신속히 대처하는 것 만이 정도이자 유일한 해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감독기관간 유기적인 협력도 중요하다. 미국은 FRB 등 5개 연방감독기관으로 구성된 연방금융기관검사위원회(FFIEC)가 감독정보를 효율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전효찬 수석연구원은 "우리나라도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 금융감독기관들이 상시로 공유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유관기관들에게 실시간으로 접근할 수 있는 체제가 반드시 선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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