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돈독한 믿음을 가진 경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이 자신의 삶을 어떤 경우에나 도와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실수로 자기 집 주변에 있는 늪에 빠졌습니다. 걸어 나오려 발을 움직일수록 그는 조금씩 더 깊이 빠졌습니다. 이를 본 이웃사람들이 달려와 줄을 던지며 잡고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그 돈독한 신앙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 신께서 나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아무 걱정 마세요."이웃들은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그 신앙인의 허리까지 늪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웃들은 겁이 났습니다. 다시 다가가 줄을 던질 테니 잡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그 신앙인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신께서 나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신의 도움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웃들은 초조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그 신앙인의 목까지 늪에 잠겼습니다. 이웃들은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줄을 던지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줄을 잡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는 그 신앙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신께서 나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신들의 요청을 들어주면 신은 나를 배신자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이웃들은 절망에 빠진 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신앙인은 '경건하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신에게 좀 섭섭했습니다. 하늘에 올라가 신을 만나자마자 그 신앙인은 신에게 투정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냉정하게 제 기원을 들어주시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데…. 당신께서 저를 구해주는 기적을 보여 주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신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지 않다니? 나는 세 번이나 너를 구하려 했지만 번번이 네가 거절하지 않았느냐?"
누가 지어냈는지 몰라도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돈독한 신앙'을 지녔다는 종교인들을 희화화(戱畵化)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를 드러내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자칫 진지하고 순수한 맑은 영혼을 우스개 거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그의 2004년 작품인 <신> 에서 이 삽화를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어 부담이 적습니다. 신>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기리고 귀하게 여기는 이른바 '신념'의 '해부학'이라고 해도 좋을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신념이란 더없이 귀합니다. 특별히 옳고 그름이 뒤섞여 삶 자체가 어수선해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이 바르고 그른지 분명하게 구분하고, 마침내 옳음을 선택하여 그것을 좇아 삶을 일관되게 끌어나간다는 것은 '소멸하는 삶을 되살려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질서가 생기고, 옳음이 선양되며, 참이 구현됩니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상황에도 휘둘리지 않으며, 어떤 유혹에서도 자신을 불변하게 지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념은 존재 자체의 순수성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드높은 가치를 추구하여 삶의 현실성을 온전하게 다듬게 합니다.
더 나아가 강조한다면 신념은 그것 스스로 존재의 기반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인간은 신념을 지녀야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그 신념의 대상은 신이어도 좋고, 이념이어도 좋습니다. 자기 자신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신념은 연필 속이나 초의 심과 같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연필은 이미 연필일 수 없고, 초도 불을 밝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념에 대한 서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념은 신념이기에 지니는 자기 한계가 있습니다. 우선 그것은 인식보다 판단을 우선합니다. 어떤 문제에 부닥칠 경우, 신념은 사실을 알아보기보다 판단을 먼저 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의 세계 안에서의 사실은 판단에서 말미암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신념의 세계에는 사실이란 없습니다. 있는 것은 다만 신념에 의한 해석과 의미부여 뿐입니다. 기술할 사실 이전에 해석된 사실이 있고, 인식할 사실 이전에 의미가 주어진 사실만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신념은 지성적인 것을 부정하거나 거절합니다. 이성적인 사유는 신념에 방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반지성성이나 비이성적임은 신념의 전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흔히 그러한 것을 넘어서야 비로소 신념은 스스로 돋아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신념의 돈독함은 반지성성이나 비이성성과 정비례합니다. 신념이 광(狂氣)에서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념에 대한 이러한 서술이 어떤 분들에게는 무척 불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왜곡된 신념이라든지 온전하지 못한 신념에 대한 기술이어서 아예 그것은 고집이라든지 독선이라든지 하는 다른 말로 일컬어야지 여전히 신념이라고 이름 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야 옳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나 집단의 행태를 보면 그렇게 다른 것으로 신념과 고집 및 독선을 구분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념이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모습으로만 고이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삶의 자리가 답답하고 어둡습니다. 어서 활짝 열리고 밝아지면 좋겠습니다. 경제도 좋아지고, 정치도 상식적이게 되고, 사회도 잘 다듬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스럽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뚜렷한 신념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그것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자리와 목표와 이상을 지탱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바로 그러한 신념에 대한 충분한 성찰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신념 자체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그 가능성과 아울러 조망하는 '신념의 해부학'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합니다. 신념의 양지와 더불어 있는 그 음지가 얼마나 어둡고 칙칙한 것인지, 그리고 자신의 신념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러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어떤 성찰도 없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철저하게 신념만을 내세워 모든 것을 휘감으려 할 수가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념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는 사실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사실의 실종은 결국 존재의 상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가 사실을 기술하지 않고 해석만을 흩날리면 결국 망하는 것은 정치이지 사실이지 않습니다. 경제도 다르지 않고, 언론도 다르지 않으며, 학문도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늪에 빠진 돈독하고 진지한 신앙인의 운명이 그러합니다. 그러한 신념의 태도는 자학이거나 자멸입니다. 이웃도, 신도 속수무책입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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