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를 했던 한 선배가 <삐삐약어집> 이란 책을 내고 한껏 기대에 부푼 적이 있다. 혹시 삐삐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가 있는가. 전화를 걸어 번호를 남기면 상대방의 단말기에 그 번호가 뜬다. 음성도 남길 수 있다. 그럼 호출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거나 녹음된 음성을 듣는다. 삐삐약어집>
일일이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번거롭기도 하고 공중전화기가 눈에 띄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삐삐약어가 등장했다. 예를 들어 7676은 착륙착륙, 약속 장소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다. 이렇게 음차를 한 간단한 것에서 시작한 삐삐약어는 날로 진화해 주절주절 제법 긴 사연까지도 담아내게 되었다.
552111152(잘 살아라). 알파벳 모양에서 연상해 만들었다. 55는 영문자 W, 꿰어맞추면 well live가 된다. 삐삐약어집이 밀리언셀러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시간이 문제긴 문제였다.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핸드폰이 급속도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지지리 복도 없던 그 선배와는 소식이 끊긴 지 오래이다.
그의 고향집 창고에는 그 책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쓸데없는 전화들이 너무 많은 지금 문득 삐삐가 그립다. 그런데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술주정을 하던 그 남자애는 어떻게 살까. 나는 그애의 단말기에 이렇게 남겨두었다. 7942(친구사이).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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