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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2> 배우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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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2> 배우 박정자

입력
2009.02.0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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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포스터의 박정자씨(66)는 육순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새(新) 무대는 언제나 날(生)것이다. 그 긴장감의 힘이 그를 거듭나게 한다.

그는 연극배우이면서 사단법인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이다. "연극 아닌 다른 일 하며 연극에 미친 열정을 바쳤으면 빵 문제는 걱정 안 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무대 밖의 역할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믿고 일을 맡긴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다는 마음 때문이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이사, 광주아시아문화중심도시위원회 위원, 의정부예술의전당 이사, 공예진흥원 이사 등 과외의 일을 "내 공부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어른으로서의 소임을 마다않는 그가 이사장 일까지 맡아 동료와 후배를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경제난의 시대, 연극배우들은 유독 춥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연극인 복지를 위해, 또 공연을 앞둔 배우로, 여념 없는 그의 시간을 빼앗았다. "올해의 첫 단추(1월)를 제대로 뀄는지 생각하면, 머리에 쥐가 나려고 한다"는 말이 엄살 아니었다.

인터뷰 중 그에게 광고 출연이 가능한지를 묻는 전화가 걸려 왔다. 부드럽게 거절한다. "광고 출연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크지만, 나를 소모하는 일이죠." 그렇게 살아왔다. 그는 "연극인은 고뇌와 두려움의 공동체"라고도 했다.

- 머리에 쥐가 난다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산울림 40주년 기념공연 무대에 올릴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 연극인복지재단 업무 등 큰 일이 한꺼번에 닥쳐서다. 1991년 초연한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딸 역할을 바꾸며 계속해 왔다. 딸을 안 바꾸면 내가 긴장이 안 돼서 못한다. 3월 중순부터 공연 예정이다."

- 연극인들은 예술계의 이를테면 무산자 계급이다. 그들의 복지를 위해 만든 사단법인 한국연국인복지재단의 이사장으로 4년째 일하고 있는데.

"원래 서울연극협회가 생기고 첫 회장으로 채승훈씨가 나서며 공약으로 내건 단체다. 당선 되고 나서 먼저 나를 찾아와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내 체질에 안 맞아 머뭇거리니. 라이벌이면서 동료이고 의지처이기도 한 윤석화가 '모든 후배가 바란다'며 강권했다.

씨름 끝에 내가 졌다. 나는 '복지'라는 말이 거북스러워 사양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연극을 통해 얻은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박정자라는 이름 석 자는 연극배우로서 얻은 게 아닌가. 내가 연극에 힘이 될 수 있다면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래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재단의 통장은 나의 팬클럽인 꽃봉지회의 이름으로 1,000만원을 입금시켜 만들었다."

- 평소 그 문제에 관심이 있지 않았나.

"모두가 막연히 어렵다고만 생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연극 아닌 다른 일 하며 연극에 미쳐 지낸 그 정열을 바쳤으면 적어도 빵 문제는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우리의 열악한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남편 밥 얻어먹으며 적어도 빵 걱정은 해 본 적 없다. 경제적 부가 가치와 뗄 수 없는 대중 스타가 아닌, 연극배우로서만의 길을 고집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 당시 외부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던데.

"정동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을 직접 찾아가서 1억원을 기금으로 확보했고, 다음 문화부장관이 된 김명곤씨도 찾아가 1억원을 확보했다.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은 한달치 월급을 희사하기도 했다. 고대연극회의 기념무대였던 '당나귀 그림자 재판'에 카메오로 출연한 20여명의 인사들도 모두 재단에 성금을 기탁했다.

2007년 예술의전당에서 펼친 '무대에서 세상으로' 등의 자리를 통해 홍보와 회원 확보에 힘썼다. 임영웅(극단 산울림 대표), 이병복(극단 자유 대표), 투병 중인 원로배우 김동원 선생 등 연극계 대선배들 덕분에 복지재단은 현재 10억여원의 기금을 확보했다. 현대중공업이 두 차례에 걸쳐 가장 크게 지원을 했다. 삼성문화재단의 도움도 크다. 홍보 효과도 대단했다."

- 가난한 연극인들은 마치 뒷전에 있는 심정이었겠다.

"'1% 운동'이 그래서 시작됐다. 연극을 통해 수입이 생기면 그 1%를 재단으로 기부하는 것으로, 현재 전체 연극인 중 1% 정도가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두고 임영웅 선생은 '피 팔러 갔더니, 피 더 빼라는 격'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내 경우는 복지재단 기부금, 여성해비타트운동 본부에 내는 기부금 등을 합쳐 한 달에 12만원이 자동이체된다."

- 연극인들의 실생활은 어떤가.

"연극인들은 의료보험조차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다. 예술인사회보장법과 예술인실업급여는 허울만 좋을 뿐, 그들이 나라로부터 받는 혜택은 아무 것도 없다. 연극인들의 한 달 평균 수입이 23만원 8.000원으로 보도되기도 했는데, 그것도 그나마 일이 있을 때다."

- 한국 연극 100주년이던 지난해 12월에는 '예술인 복지법 제정 대토론회'도 열렸는데.

"예술인 중 생활고에 가장 시달리는 연극인을 중심으로 해 복지 문제를 토론하고 사회적으로 알려가면서 개선책을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국회 문광위 소속 정병국 의원, 연극계 후배이기도 한 김을동 의원 등이 참가해 연극인의 실태를 조사 발표했다. 당시 최대의 현안은 의료보험 수혜 문제를 비롯, 4대 보험과 예술인 공제제도 등이었다. 논의에 물꼬를 튼 셈이다."

- 현재 중점 사업은.

"투병 중인 연극인들에게 심사를 거쳐 1인당 100만원 정도의 의료비를 지원하고 있다. 30여명이 혜택을 받았다. 지원금을 받고 당사자, 특히 가족들이 놀라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신병 치료에 집중해온 사이코 드라마를 확대한 '치유 드라마' 활동도 본격화할 생각이다.

인터넷, 대학로 포스터 등을 통해 관련 인재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젊은이들이 속속 동참하고 있다. 희망자에게는 1주일에 3회, 20명이 6개월 동안 강도높은 무료 교육을 시키고 있다. 한 달에 교통비조로 50만원을 지급한다. 교육 내용이 현장 아르바이트로 이어지도록 하는 데도 역점을 둔다."

- 향후 주력 사업은.

"시험에 응하는 연극인들 중에는 너무 생활이 어려워 온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큰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예술인복지법 제정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할 생각이다. 우리를 보고 최근 무용계에서도 의료보험, 사회와의 연계 등의 문제와 관련해 '전문 무용수 지원 센터' 를 만드는 등 유사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 현실적 걸림돌이라면.

"우리가 법을 너무 모른다는 게 가장 크다. 눈만 뜨면 문화, 문화 외쳐놓고 정작 당사자인 예술인들은 도외시하는 헛구호만 날리는 당국의 타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예술인 중 0.0000001%만이 부를 누리는 현실에서 무엇이 문화이고 또 무엇이 아닌지 혼란스럽다."

- '나이트 마더'를 당신의 최고의 무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혹시 재공연 계획은 없나.

"안 한다. '신의 아그네스'와 함께 너무 사랑하는 작품이지만 지금 하면 그만큼 못한다. 당시 너무너무 잘했다. 그 작품은 너무나 나를 울리고 고통스럽게 했다."

● 무대를 향한 열정도

"개인적으로 겁이 많지만, 한번 저지르고 보자고 마음먹었어요."

모노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7~28일ㆍ정미소소극장) 공연을 앞둔 연습실은 연출가와 박정자씨가 뿜어내는 열기로 달아있다. 기획팀은 '클래식 모놀로그 크로스오버'라고 그럴싸하게 간판까지 달아놓았다.

프랑스 여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지은 동명의 소설과 브람스의 실내악 작품들을 텍스트 삼아 박씨가 연기하는 1인극이다. 피아노 트리오 연주를 반주 삼아 독백이 풀려나온다. 지난해 11월 16일 성남아트센터에서 단 하루 공연이라는 카드를 써 본 것은 이번 무대의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뜻밖의 호응에 모두 고무됐다.

"나 자신을 나레이터로만 생각했는데, 그 이상이었다는 평이었어요." 사강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Goodbye Again'이고, 그것이 다시 박정자씨를 만나 독특한 모노드라마로 거듭난 것이다.

배우와 연출가의 긴밀한 소통이 실제 무대에서 어떤 결과를 빚을지도 주목된다. 연출가 우현주씨는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 박씨와 모녀로 한 번 호흡을 맞춰봤던 배우라, 서로 눈빛만 봐도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다 화가 전명자씨의 그림, 박씨의 스튜디오 동영상 등 인접 장르가 가세하니, 가히 크로스오버다.

3주 동안 하루도 쉬지 않는 일정도 특이하다. 특히 일ㆍ화ㆍ목ㆍ토요일은 오후 2시 공연, 이른바 마티네 공연이다. 주부층의 여유로운 관극을 위한 배려다. 박씨는 "문화에 목말라하는 여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 연습도 이번 공연 틈틈이 해야 한다. 공연하면서 연습하기는 처음이라고 박씨는 말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3~4월 국립중앙박물관 내 소극장 용에서 마티네 공연으로 5차례 잡혀 있다. 무주리조트에서 열릴 예정인 클래식 행사 때는 무료공연도 열 예정이다.

"원한다면 어디든 가서 할 거예요."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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