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나만 믿어." 프로포즈에 흔히 등장하는 말이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즐거운데 구체적이고 생생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행복'의 추상성과 비지속성이 실감을 방해한다. 더욱이나 행복의 조건은 사람마다 주관적일 수 있고, 상황마다 다양할 수 있다. 그래서 행복감 역시 그때그때 함량 기준이 다르다.
한 친구는 연애 시절 애인에게서 두 가지 매력을 발견하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살아보니 아니었단다. 다정다감한 사람인줄 알았더니 표현에 서툰 사람이었고, 생각보다 훨씬 그 쪽 집, 본가 중심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연인에서 가족으로 관계 양상이 변화한 가운데 함께 생활하고 전면적으로 더 많이 접촉하면서 예전의 행복감 대신 어느덧 불행하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근데 그 두 가지 때문에 내렸던 결단을 새롭게 알게 된 두 가지 상반되는 사실 때문에 뒤엎기에는 손해가 너무 많아 서로의 잠재력을 믿고 살아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 사람 역시 자기에게 실망하는 과정을 겪었을 테니 공평한 거 아니냐고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마치 도사 같았다.
그 가족의 삶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그 식구들이 경험해가는 기쁨과 애환에 달려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행복을 영원토록 찍어내는 거푸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와 더불어 연인간의 프로포즈 방식이 바뀌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행복하게 해줄게" 대신에 "불행하게 만들지 않도록 노력할게"로. "나만 믿어"에서 "우리 함께 헤쳐 나가자"로.
행복의 조건이 특수한 것이라면 불행의 조건은 매우 일반적이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 놓여도 서로 깊이 사랑하고 믿어주는 두터운 연대 안에서 행복해 할 사람은 글 속에 있다. 하지만 사회복지 예산이 줄고, 학교 급식 대신에 오는 도시락 배달이 뜸해져 배를 곯며 허기진 채 추운 방안에 웅크린 아이들은 바로 우리 동네에 있다.
추워도,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결연한 의지와 피나는 노력 속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만화, 영화, 그리고 드라마 속에 있다. 도시 재개발의 이름으로 누군가가 막대한 이익을 챙길 것을 알면서 여태 일궈온 생활 터전에서 방을 빼야 하는 사람들은 도심의 한 거리에 있다.
불행은 공감적이다. 보통 사람들이 언제 고통을 느끼는가는 뻔히 피부로 알 수 있다. 기본 생활 조건이 마련되지 않아도 개인이 하기 나름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거짓말을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삶의 수단이 워낙 풍요로워서 그런 생각을 해볼 계기가 없었거나 상상력이 빈곤해서 타인의 불행이 나의 불행감을 유발하지 못한다면 불행 조건의 유사품인 기아체험이나 진품인 철거체험이라도 해보시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도 힘든 시절 겪어서 서민의 애환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이면 옛 시절의 경험은 시효가 만료되었으니 업그레이드된 재체험을 통해서 거듭 나시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도시도, 어떤 나라도 지도자들이 구성원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실현하기란 참 어려울 것이다. '행복'은 누가 누구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삶의 건강성과 희망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가는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저 멀리 펼쳐진 지평을 희구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회가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는커녕 불행하게만 만들지 않으면 고맙겠다. 식생활, 주거생활, 교육, 건강 등 그냥 기본 설계만 갖추어 달라. 속도전으로.
윤혜린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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