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는 동네북이다. 하는 일 없이 허구한 날 싸움질만 한다고 여기저기서 얻어맞는다. 연말 연초 법안전쟁을 보면 얻어맞아도 싸다는 생각도 든다.
국회나 정치인이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다. 외국의 조크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2050년 죽은 사람의 뇌를 파는 매장에 한 고객이 들렀다. 일반인 뇌는 500달러, 의사 변호사는 10만 달러, 정치인 100만 달러였다. 의사, 변호사의 뇌는 전문지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비싼 게 당연했지만 정치인의 뇌가 100만 달러인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고객의 의문에 주인은 "정치인 뇌는 아주 새 것이잖아요"라고 답했다."
정치인들은 머리를 쓰거나 고민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사실 이런 종류의 조크는 수백가지도 더 된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인이나 국회는 두들겨 패는 대상이 돼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회가 없는 나라는 없다. 일부에서는 '필요악'으로 비유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국회나 정치인의 역할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정치인을 만나보면 그들처럼 나라와 국민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없다. 옳건 그르건 간에 그렇다. 학자나 관료, 기업인도 나라나 공익을 말하지만, 적어도 정치인만큼은 아니다. 인사청문회에서 학자나 기업인 출신들이 정치인보다 더 문제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국회나 정치인의 존재가치는 개개인의 언행이나 품격 때문이 아니고 보다 구조적인 필요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극단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으로 올려놓은 철학자 칸트를 낳은 독일이 히틀러의 나치즘에 휘말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사실(史實)에서 우리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오류를 읽을 수 있다. 만약 건전한 정치구조가 형성돼 의회가 히틀러를 견제할 수 있었다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도 그렇다. 유정회를 만들어 국회를 거수기로 전락시킨 유신 시절, 그 유산을 이어받은 전두환 정권 시절 수많은 인권유린, 끝없는 시위로 나라는 어두웠다.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국민은 권력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됐지만, 이 자유가 떼법으로 비유되는 집단적 이익분출을 초래해 역설적으로 민주화 정권의 기반을 허물어뜨렸다.
그런 혼돈스러움은 보다 능력있는 정부, 보다 정제된 정치과정을 요구했고 그 바람이 보수정권의 탄생을 가져왔다고 본다. 그러나 보수를 택한 민심이 인권이나 자유 등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거나 절차나 투명성을 일시 접어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 수도 있지만 일부 기관장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공교롭게 수사나 내사설이 흘러나오고, 속도전이라는 명분아래 룰이 바뀌는 중대한 문제에서조차 토론이 번거로운 것으로 치부되는 상황은 민심이 바라던 그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고 외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여의도, 국회다. 비록 그들이 틀릴 수도 있지만, 정부나 권력이 국회의 태클을 뒤집기 위해 재차 설명하는 과정에서 독단의 오류는 감소하게 된다. 이 과정을 불편하게 생각하면, 민주적 가치는 후퇴하고 경제적으로도 훗날의 과오를 잉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여의도는 불편하지만 필요하다. 가끔은 여의도를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봐야 할 이유다.
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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