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여행/ 니가타현… 맑디 맑은 사케 술잔 속도가 빨라지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여행/ 니가타현… 맑디 맑은 사케 술잔 속도가 빨라지다

입력
2009.02.03 01:15
0 0

혀에 닿는 그 첫 맛. 달콤한 샘물을 적시는 느낌이다. 술의 모든 잡맛을 버리고 가장 물에 가까운, 이슬같이 맑디 맑은 술, 사케다.

소설가 K씨는 한때 와인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그런 K씨가 최근 사케로 주종을 바꿨다. 그는 그 이유를 "와인을 먹고 취하면 지랄같은데, 사케는 뒤끝이 없을 뿐 아니라 취해도 정갈하게 취할 수 있어서"라고 말했다. 기자의 경험으로도 사케만큼 목 넘김이 부드러운 술은 없을 것 같다. 시원한 약수 한 모금이 몸에 스며들듯 적셔오는 게 바로 사케다.

한국에서도 최근 와인에 이어 사케 바람이 일고있다. 호텔의 유명 일식당들은 앞다퉈 사케 소믈리에가 있는 사케 바를 열고 있고, 그 순한 맛에 이끌린 젊은이들과 여성들은 사케 바나 로바다야키를 찾아 나서고 있다.

사케 열풍의 진앙지를 찾아 일본의 니가타로 떠났다. 니가타는 일본에서도 가장 많은 양조장이 있고 가장 질 좋은 사케가 나오는 곳이다. 니가타가 사케의 고장이 된 건 자연에 연유한다.

니가타현의 북서쪽은 동해를 접하고 있고 남동쪽은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다. 겨울이 오면 대륙에서 불어온 바람이 동해의 수증기를 머금었다가 산을 넘지 못하고 니가타 전역에 엄청난 눈을 퍼붓는다.

많을 땐 적설량이 4m를 훌쩍 넘는 이 눈이 녹아 일본에서 가장 긴 시나노 강을 이루면서 니가타 땅을 적시며 최고의 쌀을 만들어내고, 그 물과 쌀이 어우러져 니가타 사케를 빚어낸다.

니가타현의 양조장은 96개. 이곳에서 만드는 사케의 총 브랜드는 500개를 넘는다. 니가타는 사케를 가장 많이 생산하지만 사케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케는 주로 겨울에 생산된다. 날이 따뜻하면 잡균이 번식해 술 맛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폭설에 갇혀 옴싹달싹 못하는 겨울에 딱히 할 일도 없을 것이다. 긴 긴 겨울의 무료함과 고독을 달래는 데 사케만한 게 또 있겠는가. 지난해 열린 일본 사케 품평회에 220개의 브랜드가 출품됐고 이중 66개가 상을 받았는데 입상작의 31개가 바로 니가타산이었다.

니가타 죠에츠시에는 사카구치 기념관이 있다. 사카구치(1897~1994)는 응용미생물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누룩곰팡이 등 발효균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학자다. 그의 연구로 일본 술산업이 크게 발전해 '사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이 기념관이 있는 자리는 사카구치가 '류순(留春)'이란 당호를 짓고 친구들과 사케를 즐기며 교유하던 곳이다. 기념관에는 사람 키가 넘는 술 익는 나무통 등 옛 양조장의 모습이 고스란히 복원돼 있어 이채롭다.

사케 양조장의 우두머리는 '토지(杜氏)'라 부른다. 와이너리의 마스터와 같다. 토지는 술이 발효되는 기간 밤에도 수시로 깨어나 나무통에 귀를 대고 술 익는 소리를 들으며 술 맛을 조절했다고 한다.

니가타의 토지는 다른 지방으로도 많이 진출했다. 니가타의 술 만드는 기술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이다. 죠에츠 시에는 이런 기록들을 모은 '토지노사토' 전시관이 있다. 이곳은 양조장도 함께 갖추고 있어 술 익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시관 관계자는 쌀도 중요하지만 사케의 70%를 차지하는 물이 술 맛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물 맛이 좋아야 술 맛이 좋은 건 당연지사. 사케를 빚는 데는 연수의 샘물이 최상이란다.

니가타 사케 취재의 다음 행선지는 역사 깊은 양조장인 무사시노슈조였다. 이곳의 히다시 상무가 사케의 제조 과정을 일일이 보여주며 어떻게 말간 사케가 완성되는지 설명해줬다. 포도 자체의 당을 발효시켜 알코올로 만드는 와인과 달리 사케는 찐 쌀을 당으로 바꾸고 그 당을 다시 알코올화하는 두 번의 발효 과정이 함께 진행된다. 이를 '병행 발효'라 한다.

찐 쌀과 누룩을 병행 발효시켜 1차 주모(酒母)를 만들고 당도가 높아지면 내용물을 둘로 나눠 다시 물과 누룩, 찐 쌀을 조금씩 첨가해 술 맛을 만들어간다. 이렇게 여러 단계의 발효를 거쳐 사케가 만들어진다.

술 쌀은 일반 밥 쌀과 다르다. 지방 성분이 적은 종류를 사용한다. 최근 개발된 종자는 '고시탄데'라는 니가타산 술 쌀이다.

양주가 레드, 블랙, 블루 혹은 17년산, 21년산, 30년산 등의 차이가 있듯이 사케에도 등급이 있다. 우선 쌀을 어느 정도 정미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쌀을 많이 깎아낼수록 술 맛이 맑고 깔끔해지기 때문이다. 50% 이상 깎아낸 것이 다이긴조(大吟釀), 40% 이상 깎아낸 것이 긴조(吟釀), 30% 이상이 혼조주(本釀造), 그 밑의 것들이 저급의 보통 사케다.

또 알코올 첨가 여부에 따라 준마이(純米)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쌀과 누룩의 발효만으로 술 맛을 낸 최고의 술은 준마이다이긴조(純米大吟釀)가 되는 것이다. 일반 다이긴조나 긴조도 알코올은 술의 향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약간만 넣는다.

우리나라에서 청주에 대한 안 좋은 기억(자고 나면 머리가 지끈거리는)은 알코올이 도수를 채우기 위해 너무 많이(50%가 넘는 술도 있다) 들어간 싸구려 청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런 술은 알코올을 날리기 위해서라도 데워 먹는 게 낫지만 질 좋은 사케는 화이트와인의 적정 온도와 비슷한 6~8도 정도로 차게 식혀 먹어야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니가타 사케의 슬로건은 맑고 고운 술이란 '탄레이(淡麗)'다. 에치고유자와에서 만난 사케 소믈리에 도모히로 이구치씨는 니가타를 '일본의 부르고뉴'라고 자랑했다.

그는 가장 니가타사케다운 브랜드로 '구보타(久保田)'와 '가쿠레이(鶴齡)'를 추천했다. 구보타는 새벽의 이슬 같은 청정함이 있는 여성적인 술이라면, 가쿠레이는 약간의 향과 조금 드라이한 맛이 남성적이다.

김치찌개나 삼겹살엔 소주가 최고이듯 사케도 담백한 일본 음식과 최적의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사케를 마시는 최고의 풍류는 유키미자케(雪見酒)가 아닐까 싶다. 늦은 밤 전통 료칸의 노천온천인 로텐부로에 몸을 담근다.

뽀얀 수증기 너머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온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나무통 안의 술잔에 차가운 사케를 담아 마시는 것이다. 술이 아니라 분위기 때문에 나른한 몸은 한두 잔만으로도 흠뻑 취하게 된다.

■ 술전시관 '폰슈칸'… 시음하다 알딸딸

● 니가타 사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도쿄와 신칸센을 잇는 에치고유자와역 건물 안에 있는 '폰슈칸'이라는 술 전시관이다. 니가타의 술과 그 술에 어울리는 음식 등을 모아놓은 곳이다. 가장 손쉽게 원하는 사케를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이곳의 인기 코너는 술 시음장. 벽면 가득 아파트형의 술 시음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 니가타 지역 양조장의 대표 술 100여가지가 나오는 기계다. 500엔을 내면 5개의 코인과 작은 술잔을 건네준다. 술잔을 대고 코인 하나를 넣으면 사케 한 잔이 나온다.

● 이곳에서는 매달 부스별 코인 수를 세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인기 술을 발표한다. 2008년 12월의 인기 술 톱 10은 다음과 같다. 사케를 고르는 데 좋은 정보가 될 듯하다.

● 1위 구보타, 2위 고시노칸바이, 3위 칸츄바이, 4위 핫카이산, 5위 고시노우메슈, 공동 6위 조젠미즈노 고토시와 사무라이 우메슈, 8위 세츄바이, 9위 텐치징, 10위 하쿠류 시보리타테.

니가타(일본)=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니가타현, 그림같은 설경 '휙~ 휙'… 스키속도가 늦춰지다

지난 12일 일본 니가타현 죠에츠시의 카나야산에선 '스키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일본 스키계의 내로라 하는 명사들이 모여 함께한 자리였다. 그들이 모인 곳은 팔자 수염을 멋드러지게 기른 서양인의 커다란 동상 아래다. 1911년 일본에 처음으로 스키를 보급한 오스트리아의 레르히 소령 동상이다.

러일전쟁 직후 러시아를 꺾은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궁금해서 찾아왔다는 레르히 소령은 스키 장비 몇 점을 가지고 들어왔고, 이곳 카나야산에서 처음 스키 기술을 가르쳤다.

일본 스키 발상지 니가타는 스키 타기에도 최적의 장소다. 겨우내 퍼붓는 눈은 한국 스키어들의 로망인 뽀송뽀송한 파우더 설질에, 무릎까지 눈에 잠기는 '딥스키'의 매력을 온전히 보여준다.

니가타 스키의 양대 거점은 죠에츠시 인근의 묘코고겐(妙高高原)과 에치고유자와 인근의 나에바 스키장이다.

우리 스키장은 한 리조트가 산 전체의 스키 슬로프를 관리하지만 일본의 스키장들은 리프트마다 주인이 따로 있어 한 산자락에 다른 이름을 가진 여러 개의 스키장이 모여있다. 묘코고겐의 스키장 수도 7개에 달한다. 그 중 규모가 큰 것은 묘코 스기노하라와 아카쿠라 간코, 아카쿠라 온센, 이케노타이라 온센 등 4곳이다. 이중 아카쿠라 온센을 뺀 3곳은 통합권 하나로 전체를 이용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높은 고도와 가장 긴 슬로프를 가지고 있는 곳은 묘코 스기노하라. 해발 1,865m에서 시작해 8.5km 길이를 타고 내려온다. 표고차는 1,124m. 넘어져도 아프지 않은 푹신한 눈과 급하지 않은 경사로 초보자도 큰 부담 없이 내려올 수 있다. 기다리지 않는 리프트, 거칠 것 없는 나만의 슬로프. 한국의 스키가 기다리다 지친다면 한적한 일본의 스키는 타다가 지친다. 그림같이 눈을 이고 있는 장대한 삼나무 숲을 지나고, 눈빛만큼이나 하얀 자작나무 숲을 스쳐 내려간다. 슬로프 중간에 만나는 수령 300년 된 피나무는 이 스키장의 랜드마크다. 둥글게 가지를 펼친 모습이 신령스럽다.

묘코고겐의 대표 스키장은 아카쿠라 간코 스키장이다. 슬로프가 많아 스기노하라보다 훨씬 다양하게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이 스키장의 중간, 해발 1,000m 지점에 아카쿠라 간코 리조트가 있다. 1937년에 지어진 아름다운 오스트리아풍의 스키 호텔이다. 이른 아침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이 아름답다. 일본 100대 명산 중 하나인 묘코산(2,523m) 봉우리가 장엄하고, 맞은편엔 골골마다 운해를 품고 있는 산자락이 백두대간처럼 장쾌하게 이어진다.

묘코고겐의 스키장 중 세키온센 스키장은 규모는 작아도 압설을 하지 않은 자연설로 유명한 곳이다. 1m가 넘게 쌓인 눈 속을 헤집는 재미에 일본 스노보더들에게 인기가 많다.

에치고유자와 인근에는 13개의 스키장이 있다. 그 중 최고로 꼽는 스키장은 나에바다. 다케노코산(1,789m)을 정점으로 27개의 슬로프와 18개의 리프트를 갖춘 매머드급 스키장이다. 단일 규모로는 일본에서 제일 큰 곳이다. 최장 활주거리가 4km에 이르고, 야간(밤 9시까지)에도 일부 슬로프를 개장한다.

나에바 스키장의 또 하나의 명물은 '드래곤돌라'. 길이 5.5km의 세계 최장 곤돌라다. 이 곤돌라는 산 옆자락의 카구라, 타시로, 미츠마타 스키장을 연결한다. 이 3곳 스키장의 슬로프 수는 모두 23개. 나에바 스키장 통합권이 있으면 4개의 스키장을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이중 카구라는 나에바보다 슬로프 정상(1,845m)이 높고, 눈도 더 많이 내린다. 카구라 스키장의 베이스에는 '파우더 스테이션'이라는 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이곳은 묘코고겐의 세키 온센 스키장처럼 자연설 그대로의 파우더 스키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에치고유자와 시내의 갈라 스키장은 신칸센역과 바로 이어져 있다. 플랫폼을 나오면 바로 스키 베이스. 리프트 발권과 렌탈이 이뤄진다. 이곳에서 곤돌라를 타고 오르면 해발 800m 높이에 본격 스키장이 펼쳐진다.

스키 말고도 눈을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스노슈잉이 있다. 설화를 신고 하는 눈길 트레킹이다. 특히 밤에 눈길 걷기는 독특한 추억을 선사한다.

묘코고겐의 야간 스노슈잉 체험. 이마의 헤드랜턴에만 의지한 채 밤의 눈길을 걷는다. 뒤꿈치가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설화는 걷기에 편하다. 푹푹 빠지는 눈밭을 1km쯤 걸어 오르자 가이드가 불을 모두 꺼보란다. 칠흑같은 어둠일 거란 예상과 달리 눈이 비추는 설광에 주변의 풍광이 고스란히 들어온다. 다시 내려오는 길. 경사가 심한 곳은 엉덩이를 깔고 미끄러져 내려온다. 눈썰매가 따로 없다. 아무도 밟지 않은 신설 위로 겅중겅중 맘껏 눈도장을 찍는다. 밤의 설경을 온전히 가슴에 담는다.

■ 여행수첩

니가타로 가는 길은 크게 3가지. 니가타공항이나 도야마공항?이용한 항공편과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묘코고겐의 스키장은 도야마공항이 가깝고, 에치고유자와 지역의 스키장은 도쿄에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신칸센을 타는 게 편리하다. 열차역에서 스키장까지 무료 셔틀이 다닌다.

투어앤스키(www.tournski.com), 일본스키닷컴(www.ilbonski.com) 등이 니가타의 스키장 여행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2월 기준 3박4일은 최저 80만원 대, 4박 5일은 90만원 대다. 상품가에는 2,3일치 리프트권이 포함돼 있다. 스기노하라나 아카쿠라 간코의 리프트권을 따로 끊으면 하루 4,000엔, 3,900엔 정도다. 통합이용권은 4,500엔이다. 숙소로 료칸이나 고급 호텔을 원할 경우 스기노하라에서 가까운 '이치노 야도 겐'(http://yado-gen.com)이나 아카쿠라 스키장 중턱에 있는 '아카쿠라 간코 리조트'(www.akhjapan.com)가 좋다.

나에바 스키장 바로 앞에는 프린스호텔(www.princehotels.co.jp/naeba)이 있다. 시내의 유자와 그랜드호텔(www.yuzawagrandhotel.jp)은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료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니가타 한국사무소 홈페이지 www.niigata.or.kr

니가타(일본)=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길에서 띄우는 편지/ 설국(雪國) 니가타현

니가타는 눈이 많아서 '설국(雪國)'이기도 하지만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소설 '설국'의 실제 무대이기도 합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설국이 펼쳐졌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니가타현 에치고유자와의 '다카한'이라는 료칸(일본 전통 여관)에서 쓰여졌습니다.

이번 니가타 취재길, 다카한을 운영하고 있는 다카하시 이와오(37)씨를 만나 료칸과 '설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카한의 역사는 수 백년을 거슬러 오릅니다. 지역 신문에서 니가타의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소개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의 37대 할아버지가 아무도 살지않던 이 곳에서 우연히 온천을 발견했고, 그로부터 800년 동안 후손들이 가업을 이어가며 온천장을 지키고 있답니다. 다카한은 소설 '설국'뿐 아니라 에치고유자와란 도시를 탄생시킨 시발점인 셈이죠.

가와바타가 '설국'을 집필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건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입니다. 당시 에치고유자와엔 료칸이 다카한을 포함해 3개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다카한을 운영하던 35대째 주인(다카하시씨의 외할아버지)이 저자의 대학(도쿄대 문학부) 15년 후배라는 인연으로 이곳을 거처로 삼고 글을 집필했다고 하네요.

예전 목조건물이던 료칸은 이제 콘크리트 건물로 리모델링 됐지만 당시 저자가 묵었던 방은 그 자리에 옛 자재 그대로 재현돼 있습니다. 저자가 "잡다한 일들을 잊을 수 있어 신선한 공상의 향이 솟는다'고 했던 방입니다.

이 다카한에서 제일 묵직한 감동을 받은 건 가와바타의 방이나, '설국'의 여주인공 모델이 된 사진 속 게이샤 마츠에이의 뇌쇄적인 미모가 아니라 대대로 가업을 지켜온 800여년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겐 그만한 역사를 지닌 가업이 뭐가 있을까요?

현재 다카한의 사장은 다카하시씨의 어머니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나 사위로 대를 이어 내려온 것이죠. 다카하시씨의 직책은 유모리(湯守ㆍ온천지킴이)로 곧 어머니의 뒤를 이어 다카한의 총책임자를 일컫는 37대 '다카하시한자에몽(高橋半左衛門)'이 될 것입니다.

그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일본 제일의 여행사인 JTB 캐나다 지사에서 수 년간 경력을 쌓았지만 과감히 고향에 돌아와 자랑스럽게 료칸의 주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선 이처럼 외국에 나가 박사 학위를 따고서도 고향의 작은 가업을 잇는 일들이 흔히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저는 소설 '설국'을 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카한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설만큼이나 드라마틱했습니다. 한편의 푸근한 가족드라마를 보고 난 느낌이라고 할까요.

참, 다카하시씨가 그러는데 가와바타의 부인은 에치고유자와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집 떠난 남편이 3년이나 머물며 게이샤와 사랑에 빠졌던 곳에 남들처럼 좋은 기억을 새길 순 없었겠죠.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