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출판업계에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중견 도매상이 문을 닫으면서 거래를 했던 출판사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주인이 잠적해버린 것입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출판사들이 금전적 손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제게 말해주는 모 출판사 관계자는 이로 인한 배신감과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속이고, 배신하고, 버렸을 때 사람들은 대개 그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이 감정은 자칫하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하기 일쑤입니다. 누구나 알겠지만 미움과 분노에 의한 충동적 행동의 결과는 훗날 반드시 큰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어느 날 사람들에게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도사가 시골 마을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았다고 합니다. 수십 명을 모아놓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파하면서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자신이 행복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주민 가운데 미워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무도 손들지 않았습니다. 그만치 살면서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때 할머니 한 사람이 뒤늦게 손을 들었습니다.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냐고 전도사가 묻자 할머니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자신이 미워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인간은 언젠가 이 땅을 떠날 존재들입니다. 그 사실에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고 변함도 없습니다. 밉고 화가 나고 분노가 폭발하려 할 때 참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읽은 어떤 책에서는 주인공이 인디언들의 고통 참는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겐 몸의 마음과 영혼의 마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선생에게서 참을 수 없도록 많은 매를 맞을 때 그는 비명 한번을 지르지 않습니다. 몸의 마음을 잠재우고, 대신 영혼의 마음은 몸의 바깥으로 빠져나가 마음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서 매맞는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몸의 고통을 느끼는 건 육체의 마음뿐이고 영혼의 마음은 절대 고통스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결국 주인공을 때리던 선생은 제풀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미워지고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를 때는 이렇게 몸의 마음과 영혼의 마음을 분리해야 합니다. 저는 이걸 유체이탈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 인간은 훈련하기에 따라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제3자가 되어 바라볼 수 있습니다. 화를 내야 하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상황에서 그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내가 관찰하는 것입니다. 허공에 떠올라 부당한 대우를 받아 부르르 떨고 있는 나 자신을 또 다른 내가 내려다보면 어느새 그러한 화는 어리석은 것이 되고 맙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어렵더라도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거리를 떼고 관찰해줄 수 있는 자세. 화가 나고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곧 폭발하려 할 때 내 영혼을 격정에 휩싸인 육체에서 이탈시키십시오. 그리고 허공에서 나를 내려다보십시오. 그러면 분명 별 것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있거나, 참을 수 있는 것을 못 참아 하는 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 단계를 참고 넘어가면 두고두고 잘 견뎌냈음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고정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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