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훈 지음/문학동네 발행ㆍ288쪽ㆍ1만원
"원고를 모아놓고 보니까 태반이 섬과 바다의 이야기네요. 여기에 너무 잡혀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적잖이 들기도 하지만, 저라도 이렇게 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요…"
한창훈(46)씨의 다섯번째 소설집 <나는 여기가 좋다> 는 바다에 발목잡힌 이들의 이야기다. 모두 8개의 단편으로 엮여있는데, 작중인물들은 자신의 존재근거가 바다와 포개어져 있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첫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1996) 이래로 한 번의 일탈도 없이 고집스럽게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어온, 좀체 그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작가 한씨의 분신이기도 하다. 바다가 인생의 성공을 가져다 주었건 좌절을 가져다 주었건, 그것은 좀처럼 흔들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운명이라는 것. 바다가> 나는>
표제작의 주인공은 뱃사람인 아버지에게서 어린시절부터 "너는 울다가도 뱃소리만 들으면 울음을 그쳐부렀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스무살 무렵부터 만선을 한 소년선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쉰 살의 사내다. 사내는 고집스럽게 큰 배를 샀다가 어장이 죽어 몇 년간 큰 손해를 본 뒤 배를 팔아버린 막막한 처지. 남편이 남든 말든 자신은 뭍으로 떠나겠다는 아내는 사내에게 "도대체 바다가 뭐요? 뭐냐고, 당신한테" 혹은 "결국 바다가 당신을 망친다는 것을 모르요"라고 말한다.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떠나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그럴 수 없어. 번민이 사내의 의식 속에서 진자처럼 왔다 갔다 하는데, 이는 단지 '바닷사람'만의 번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근거가 허물어지는 상황 앞에 던져진 인간의 보편적 고뇌로 읽힌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다른 작품 '아버지와 아들'에서 작가는 바다라는 운명이 세대를 초월해 자기장을 뻗치고 있음을 형상화했다. 동네에서 가장 작은 배의 선주인 주인공은 아들을 어떻게든 뱃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항구의 수산물가공처리장의 관리직으로 아들을 취직시키기 위해, 그곳 사장에게 자연산 돔을 선물해서 환심을 사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돔 낚시를 함께 가기로 했던 아들은 새벽녘 만취해 들어와 아비의 억장을 무너뜨린다. "난 뱃일 할라요. 나중에 양식장도 할 거고. 아부지 아들인데 어디 가겄소." 아들의 말을 들은 그는 아무리 발버둥친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끈의 존재를 자각한다.
미쳐 날뛰는 삼각파도, 여차하면 뒤집어질듯한 배, 사투에 가까운 바다낚시 등 거친 바다사나이들의 이야기가 한창훈 소설의 큰 화폭이라면, 다른 한편에서는 아기자기한 그림엽서같이 누선을 살포시 자극하는 사랑 이야기, 서정적 그림도 펼쳐진다.
뭍에서 큰 빚을 진 뒤 섬으로 쫓겨들어와 사랑 따위는 다시는 않겠다고 다짐한 다방 여종업원이 뱃사람 사내의 순정에 무너지는 과정을 다룬 '올 라인 네코'나, 눈 내리는 밤 선창 술집의 늙은 작부와 술잔을 기울이며 그녀의 사랑 얘기를 들어주는 사내의 이야기인 '밤눈'은 마치 <봄빛> 의 작가 정지아씨의 단편소설처럼 애틋함을 자아낸다. 봄빛>
무엇보다 한씨 작품의 묘미는 3년 간의 뱃사람 경험에서 우러난, 흐벅진 육담과 민중의 잠언적 지혜가 곁들여지는 소설언어다. "들이대는 꼴을 보고 있자면 선산 팔아먹은 오촌 같을 때가 있지만 그래서 이르기를 불알과 자식은 짐스러운지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늙은 소 간신히 깨워 밭까지 데리고는 갔으나 도착과 동시에 드러눕는 꼴이다" "소장은 역시나 똥 누러 왔다가 알밤 주웠다는 표정이었다" 같은 맛깔스러운 표현들은, 도시문명에 갇힌 자폐적 글쓰기가 대세인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보기드문 귀한 자산이다.
여수에서 2시간 가량 떨어진 고향 거문도로 들어가 3년째 살고 있는 한씨는 "생활 패턴이 소설 속 사람들과 비슷한 것 같다. 변방사람들의 생활, 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여전히 기껍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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