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국내 최연소 프로기사 박정환(16세 ㆍ 4단)이 큰 일을 하나 해 냈다. 제4기 원익배 십단전에서 이창호, 백홍석 등을 차례로 물리치고 본격 기전에서 첫 우승을 한 것이다.
이창호(14세ㆍ1989년 제8기 KBS바둑왕전 우승)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우승 기록이다. 박정환은 우승 인터뷰에서 "다음 목표는 세계 타이틀, 특히 병역 혜택이 주어지는 후지쯔배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데 며칠 후 박정환은 기사회로부터 뜻밖의 '안내문'을 받았다. 병역법 시행령이 개정돼 그동안 응씨배와 후지쯔배 우승 및 준우승자에게 주어지던 병역 대체 복무 혜택이 올해부터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후지쯔배 우승으로 세계 타이틀과 병역 혜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던 박정환의 야무진 꿈이 채 영글기도 전에 깨져버린 것이다.
사실 병역법 시행령이 이같이 바뀐 지는 꽤 오래 됐다. 병무청은 월드컵 축구와 세계야구선수권대회(WBC) 4강에 오른 프로 축구와 야구 선수들에게 병역 혜택을 준 데 대해 비인기 종목의 반발이 커지자 2007년말 줄어드는 병역 자원 확보와 다른 분야와의 형평성을 들어 일부 종목에 대한 병역 대체 복무 대상을 대폭 축소했다.
이 과정에서 바둑도 체육으로 간주, 응씨배와 후지쯔배 등 특정 세계 대회 입상자에 대한 병역 혜택 규정을 없애고 대신 다른 체육 종목과 같이 4년에 한 번 있는 아시안 게임 우승 및 올림픽 3위 이상의 경우에만 대체 복무 대상에 포함키로 했다. 바둑계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당시 국내 프로기사들이나 바둑계에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이 같은 규정 변화에 당장 해당되는 사례가 없는데다 공식 시행을 앞두고 병무 당국과의 협의 과정에서 좀더 나은 방안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년간 한국기원과 병무 당국과의 협의 결과는 바둑계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사실 그 동안 프로 기사들에게 대체 복무라는 병역 혜택이 주어진 것은 전적으로 이창호 덕이다. 1994년 무렵 세계 바둑계 지존으로 군림하던 이창호의 군 입대 문제로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병무 당국이 병역법 시행령을 개정, 당시 열리고 있던 국제 기전인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응씨배 등 3개 대회 결승 진출자에 대해 대체 복무 혜택을 주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창호가 1992년 동양증권배 우승 자격으로 1995년부터 1998년까지 34개월간 한국기원에 근무하면서 프로 기사 활동을 수행했고, 이후 최철한(2005년 응씨배 준우승) 송태곤(2003년 후지쯔배 준우승) 박영훈(2004년 후지쯔배 우승)에 이어 현재 박정상(2006년 후지쯔배 우승)이 대체 복무중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한데 문제는 그 후 세계 대회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 1996년 삼성화재배 LG배 등 한국이 주최하는 2개의 대형 국제 기전이 신설된 것을 비롯 춘란배 도요타덴소배 등 많은 국제 기전이 새로 만들어졌고 반면 동양증권배는 1999년 중단됐다.
하지만 병역법 시행령의 규정은 변함없이 계속 그대로여서 결과적으로 국내 프로 기사들이 대만과 일본이 주최하는 세계 대회서 입상하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반해 정작 더 규모가 큰 한국 주최 기전 입상자는 혜택에서 제외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기원은 이에 따라 삼성화재배와 LG배를 대체복무대상에 추가하거나 아니면 응씨배와 후지쯔배를 국내 대회로 대체해 달라고 여러 경로를 통해 병무당국에 꾸준히 요청했으나 병역 혜택 자체를 점차 줄이는 추세여서 불가하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동안은 응씨배와 후지쯔배서만 계속 젊은 기사들이 입상했을 뿐 삼성화재배나 LG배서는 병역 문제가 걸리는 기사가 결승에 진출한 사례가 없어 그럭저럭 지나갔으나 작년 제12회 LG배서 '괴물 초단' 한상훈이 준우승을 차지하자 이 문제가 또 불거졌다. 한국기원이 지난 해 다시 병역 당국과 접촉했던 것은 그래서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커녕 병역법 시행령 개정으로 인해 저간의 혜택마저 아예 없어지고 대신 2009년부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입상의 경우에만 대체 복무 대상에 포함시키겠다는 답변을 듣게 됐다. 혹 떼려다 오히려 혹 하나 더 붙인 셈이다.
한국기원은 대체 복무가 정 어렵다면 국군 상무부대에 바둑팀을 신설하거나 혹은 해군 마술병이나 공군 게임 특기병처럼 프로 기사들이 현역으로 근무하면서 바둑을 계속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했으나 바둑계의 역량이 부족해서인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무 당국은 바둑계가 스스로 '바둑은 체육'이라고 표방하고 있고 대한바둑협회가 현재 대起셈걷?준 가맹 단체인데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이미 바둑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으므로 다른 체육 종목과 같이 취급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한국기원은 아직 대한바둑협회가 대한체육회에 정식으로 가맹한 상태도 아니고,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바둑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지만 체스의 부수 종목으로 취급되고 있어 아직 확실히 정식 종목 자격을 얻었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라, 최소한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내년 7월까지 만이라도 새로운 규정의 시행 유보를 요청했지만 작년말 병무청으로부터 이마저도 불가하다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근 박정환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자 한국기원이 서둘러 기사회 명의로 소속 기사들에게 병역 특례 대상이 올해부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입상자로 변경됐다는 안내 공문을 보낸 것이다. 안내문을 접한 젊은 프로 기사들은 모두들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다.
20대 초반의 한 신예 기사는 "바둑이 내년에야 비로소 사상 처음으로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에 들어가고 올림픽 출전은 아직도 한참 먼 얘긴데 병무 당국이 너무 앞서 가는 것 같다"며 "바둑이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에서 확실하게 정식 종목으로 자리잡을 때까지는 다른 체육 종목과의 형평성 차원에서라도 기존 대체 복무 제도를 존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스포츠 종목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프로 기사들에게 병역 문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특히 한창 기력이 늘고 있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프로 기사들에게 군 복무 기간 동안의 공백은 엄청난 부담이다.
실제로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 대회 4강에 입상한 60케이스 가운데 무려 47건을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송태곤 목진석 등 병역 면제 기사들이 휩쓸었다.
군 복무 이전에 4강에 오른 사례는 조한승 원성진 홍민표 백홍석 등 8건에 불과하고 군 복무후 4강에 오른 건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등 3명에 5건 밖에 없다. 그나마 이들이 군 복무를 했던 1970년대는 비교적 자유롭게 공식 기전에 출전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프로 기사가 성적을 내는데 병역문제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금으로서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국내 젊은 프로 기사들에게 열려있는 거의 유일한 병역 혜택 기회인 셈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바둑의 정식 종목 채택이 유력한 인천 아시안 게임까지 4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 후로는 아무런 기약이 없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최소 3개 대회 12년 동안은 정식 종목을 유지해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부문에 남녀 단체전과 혼성페어전 등 3개의 금메달이 걸려있다는 것.
지난 번 세계마인드스포츠게임즈와 같이 단체전이 프로 포함 5명으로 구성된다면 단 번에 여러 명이 혜택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단체전에 몇 명이 출전할 지, 프로가 중심이 될 지, 아마추어 위주로 할 지, 그 어느 것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모든 게 첩첩산중 오리무중이다. 아직 16살 밖에 안 된 새내기 박정환이 벌써부터 군대 문제를 걱정하는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박영철 객원 기자 indra0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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