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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음악·열정·향수·정… 지금도 '樂園'을 꿈꾸는… 낙원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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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음악·열정·향수·정… 지금도 '樂園'을 꿈꾸는… 낙원상가

입력
2009.02.0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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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과 노인은 한데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같다. 홍대, 신촌, 강남역 주변 등 청년들이 붐비는 곳에서 노인들을 보기 어렵고, 노인들이 자주 찾는 종로 탑골공원에서는 청년들의 자취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서울의 심장부 종로와 대표적 관광가인 인사동길을 면하고 있는 종로구 낙원동 284-6, 그곳에서 배고픈 악어처럼 입을 쫘악 벌리고 있는 낙원상가와 그 일대 골목들은 청년문화와 실버문화가 공존하는 이색지대다. 상가 곳곳에는 40년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 없는 쇠락의 징조가 눈에 띈다.

행정당국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이르면 2012년께부터 상가를 철거하고 이곳을 도로로 만들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이 퇴락해가는 상가를 축으로 젊은이들은 젊은이식으로, 나이든 이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각자의 공간에서 할거하며 세대의 지형도를 그려내고 있다.

1968년 문을 연 낙원상가는 지하의 재래시장, 1층 도로, 2,3,5층이 상가, 4층 영화관으로 구성된 주상복합상가다. 2,3층은 '악기 도서관' 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은 초대형 악기상가다. '소리나' '하모니' 같은 상호의 점포 230여개가 여기에 둥지를 틀고 통기타, 일렉트릭기타, 베이스기타, 드럼, 피아노, 키보드, 색소폰, 신디사이저, 바이올린, 플룻, 집회용 마이크, 앰프, 대형 스피커 등을 판매, 대여한다.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 같은 가족 단위 손님, 취미로 악기를 배우려는 중장년층도 간혹 눈에 띄지만 이곳의 주류는 후드티, 청바지 차림에 거북이 등딱지 같은 기타를 들쳐멘 대학생, 혹은 치렁치렁 장발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가죽부츠를 신은 히피풍의 청년들이다.

이들은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 없이 위안 받았네 나 이미, 그때/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 중에서)라고 시인 유하가 노래했던 바로 그이들이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클릭만 하면 간단히 악기를 주문할 수 있지만, 낙원상가에서 처음 악기를 구입했고, 악기를 튜닝하고, 수리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청년들은 중독처럼 이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친구 손에 이끌려 중학교 시절 낙원상가를 찾았고 일렉트릭기타를 구입했다는 인디밴드 '동물농장'의 보컬 김우진(20ㆍ서울 강동구 상일동)씨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기타를 샀을 때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며 "인터넷으로도 악기나 비품을 살 수 있지만, 가게 주인의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낙원상가만의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음악이라는 만국공용어 앞에서는 국적도 불문이다. 홍대 앞 클럽에 가수와 기타 주자로 출연한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라이언 디도메리츠(26)씨는 각양각색의 기타 앞에서 "원더풀"을 연발했다. 그는 "대만, 일본 등도 가봤지만 이렇게 다양한 악기를 대규모로 파는 상가는 없다"며 "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악기상가층이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탑골공원에서 상가 동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과 상가 4층의 영화관은 실버 세대를 위한 공간이다. 낙원상가 동쪽 골목에는 전주집, 충청도집, 광주집, 소문난 우거지해장국 등 토속적인 옥호의 맛집들이 보쌈, 감자탕, 머릿고기, 순대국밥, 닭도리탕, 해장국, 곱창볶음, 오징어볶음 같은 서민적 음식을 판다.

우거지얼큰탕 한 그릇 1,500원, 황태해장국 한 그릇 2,000원이라는 '믿지 못할 가격'에 장사를 하는 이곳 식당들은 낮은 목재 평상에 플라스틱 의자, '천하일미옥(天下一味屋)' 따위의 낙서가 휘갈겨진 벽지로 허름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인근 경운동 종로노인복지센터와 탑골공원으로 마실 나왔던 노인들로 늘 문전성시다.

강수문(71ㆍ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씨는 "주머니 가벼운 우리 같은 이들에게 이곳은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라며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곳 맛집들을 순회한다"고 말했다.

낙원상가 4층 허리우드극장에는 실버 세대 전용관도 있다. 허리우드극장은 단성사, 서울극장, 명보극장과 함께 70,80년대 서울의 대표적 개봉관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멀티플렉스 등장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허리우드극장의 3개관 중 하나는 지난해 고전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하는 '허리우드 클래식'으로 이름을 바꿨고 최근에는 '실버전용극장'으로 탈바꿈했다.

이 극장의 57세 이상의 입장료는 단돈 2,000원.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미소 짓고 있는 좌석 배치도가 향수를 자아내고, 빈 자리만 있다면 같은 영화를 여러 차례 봐도 제지하지 않는 곳이다.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추억의 명화는 물론 '미인도' '맘마미아!' 같은 최근 개봉작도 상영할 예정이다.

여고 동창들과 함께 극장을 찾은 용선식(61ㆍ서울 종로구 혜화동)씨는 "허리우드극장 매표소 앞에서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며 "이곳이 다시 우리 세대를 위한 극장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라고 환영했다.

아직 실감나지 않지만 낙원상가 철거를 '언젠가는 닥칠 일'로 받아들이는 상인들은 마음이 편치 않다. 김기정(46) 낙원악기상가 상우회장은 "세운상가는 악기상들이 들어오면서 생긴 문화적 가치 때문에 값어치가 높아졌는데 '철거' 운운 하는 것은 단견"이라 "외관 정비 등 리모델링에 관한 여러 방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고 궁리 중"이라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낙원상가 터줏대감 지병옥 사장

"글쎄, 40년인가 41년인가… 그쯤 된 것 같은데."

신광악기 지병옥(70) 사장은 낙원상가의 터줏대감이다. 상가가 공예품 가게, 옷가게로 가득하던 시절(정확한 연도를 기억 못 했다)부터 이곳에서 악기점을 운영했다. 그의 가게는 플루트 수리점. 연필처럼 깎은 나무젓가락에 헝겊을 감은 도구로 단뽀(패킹)를 갈고, 백동(니켈)에 윤을 내는 것이 지 사장의 일이다.

"플루트 부는 사람치고 날 안 찾아온 사람이 없을 거야. 옛날에는 이봉조씨, 길호균씨 같은 악사들이 자주 왔었지. 70, 80년대는 악단의 전성기라 일이 참 많았어. 요즘은 대학교수들이 주로 와. 최기창 교수, 송경화 교수 다 단골이야."

귀찮다는 듯 일에 몰두하던 지 사장의 어투가 자신의 옛 얘기에 취해 눅진해져 갔다. 냄비를 땜질하다 얼결에 관악기 수리공이 됐다는 스승 얘기, 대학 실기시험에 들고 갈 악기가 없어 발을 구르는 학생에게 그냥 플루트를 줬던 얘기, 라면값이 없어 눈치만 보던 악사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던 얘기가 무명실 타래처럼 풀려나왔다.

지사장은 자신의 인생에 자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낙원상가가, 그리고 밴드 문화가 쇠퇴해가는 데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후계자에 대해 묻자 목소리에 밴 아쉬움이 짙어졌다. "가업으로 물려주려고 둘째 아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냈는데, 악기 수리를 배우다 아들은 중간에 전공을 경영학으로 바꿔버렸어."

지 사장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데 한 노인이 "박사님" 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엄토미 악단'의 플루티스트 김기진(80)씨다. 건강을 묻는 김씨에게 지 사장은 "앞으로 25년만 더 할게요"하고 대답했다.

"몇 해 전에 남대문시장 시계점에 갔는데, 아흔이 넘은 노인네가 돋보기를 쓰고, 또 확대경을 대고 시계를 수리하고 있더라고. 난 아직 확대경까지는 안 대도 되니까."

재개발 얘기를 꺼냈더니 지 사장의 목소리가 오히려 담담해졌다. "낙원상가는 그냥 내 삶이야. 전부지. 군악대 나와서 악단 생활을 하다가 서른이 안 돼 들어왔어. 그리고 이 나이 될 때까지 이 일로 우리 식구가 먹고 산 게지. 희로애락이 여기 다 있어. 글쎄, (재개발이) 어떻게 판명 나든, 이 건물에 얽힌 악사들의 추억만은 살렸으면 해.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유상호기자 shy@hk.co.kr

■ 낙원의 낙심/ 음악인들 "추억·꿈 깃든 곳이 사라지다니… "

대중음악인, 특히 기타 연주자들에게 낙원상가는 그야말로 제2의 요람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낙원상가의 재개발 소문은 실향민의 심정을 가늠케 하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다.

1962년 한국 최초의 로큰롤 밴드 '애드 포'를 만들고 한국적 록음악을 개척한 신중현은 낙원상가의 마지막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전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낙원상가에 담긴 수많은 추억을 대신해 간단한 문구를 적어 보냈다.

신중현은 "또 하나의 문화가 사라진다. 50년대 중반부터 종로 2, 3가에 하나 둘 생겨난 악기점들이 거대한 상가를 이루어 우리 음악문화의 막강함을 세계에 과시했는데, 사라진다니 안타깝다"고 개탄했다.

한국적 블루스를 정립한 '신촌블루스'의 리더 엄인호는 "낙원상가가 없어지면 노인들에게 파고다공원이 사라지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라며 아쉬워했다. "제가 79년에 방위 받을 때부터 낙원상가에 매일 갔죠. 엑스트라 밴드 일자리를 얻으려고요. 일당이 한 8,000원 정도 했나. 사람들이 중앙 복도에 모여 담배 피우며 일거리를 기다렸죠.

근처 추어탕 집에서 500원 짜리 식사를 하고 악기점에서 빌린 기타로 일 나가는 게 일상이었어요. 80년대만 해도 낙원상가 악기점 주인들이 수입 기타를 너무 싼 값에 외국인들에게 파는 경우가 많았어요. 귀중한 앤틱기타가 헐값으로 팔려 안타까운 마음에 일일이 제값을 알려주곤 했죠. 나이든 사람들이 파고다공원에 모이듯 지금도 1주일에 두 번은 꼭 낙원상가를 찾죠."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은 '왕자파스'란 별명의 악기점 주인에 대한 기억을 얘기했다. "86년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할 때 대림악기라는 가게에서 당시 가격으로 250만원인 '소노'라는 드럼을 팔았어요. 가게 주인이 머리가 단발이어서 왕자파스라 불렀는데 그분한테 볼 때마다 깎아 달라 해서 170만원에 산 기억이 있어요. 그 때만 해도 악기를 전문적으로 배달해주는 '용달'업체 분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서울음향의 조진윤 사장님도 있어요."

전태관의 밴드 동료인 김종진은 "80년대 저의 집에 살던 프로음악인들에게 소개받아 낙원상가를 알게 됐어요. 아무리 구하기 힘든 악기라도 소비자들에게 공급하는 자존심이 살아있는 곳이었어요"라고 추억한다.

'작은별가족'으로 1975년 가요계에 데뷔한 '나무자전거'의 강인봉은 70년대의 낙원상가 풍경을 소개했다. "70년대엔 악사시장이 성행했죠. 오후 3, 4시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요. 낙원상가 보면 가운데에 광장처럼 넓은 곳이 있어요.

거기서 흥정이 이뤄지죠. 야간업소, 카바레 등에서 일명 연예부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와서 '악보 볼 줄 아냐' 이렇게 질문을 하고 즉석에서 연주자들을 픽업해 가곤 했죠.

당시만 해도 음악인이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힘들었잖아요. 저도 몇 번 뽑혀가곤 했죠. 80년대 말부터 이런 풍경이 사라졌어요. 생음악으로 춤추고 즐기던 시절이 가고 디제이와 노래방이 나오면서 없어진 거죠."

강인봉은 많은 음악인들이 낙원상가에서 도제식 교육을 통해 성장했다고 말한다.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겨나다시피 하면 낙원상가로 모여들었어요. 여기서 선배 연주인들의 헬퍼로 일하며 어깨 너머에서 음악을 배우는 거죠. 낙원상가에서 배출된 음악인들과, 대학가요제 등 대회를 통해 입문한 음악인들의 두 계파가 존재한 것도 낙원상가가 낳은 모습입니다."

헤비메탈 그룹 '블랙홀'의 리더 주상균도 낙원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한다."고등학교 시절 그곳에 가면 사진으로만 보던 악기들이 가득해 꿈만 같았죠. 간혹 신문에서 보던 뮤지션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리고…. 시험이 끝나면 항상 낙원상가로 갔어요. 감히 살 수도 없는 악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요. 이곳이 사라진다니 마치 임종을 앞둔 친지를 보는 것 같아요."

90년대 초반 데뷔해 비교적 '신세대' 뮤지션에 속하는 '불독멘션'의 이한철에게도 낙원상가는 잊기 힘든 공간이다. "요즘은 기타보다 컴퓨터로 악기를 대신하니까 많이들 찾지 않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항상 음악인들로 북적이던 곳이었어요. 음악을 함께 만들면 누구나 식구처럼 변하듯이 이곳의 분들도 하도 자주 만나다 보니 친구 이상의 유대감이 생겼죠.

단골 악기점의 직원들이 공연 때마다 찾아오고 새 악기가 들어오면 잊지 않고 알려줬어요. 정말 훈훈했죠. 제가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 오면 항상 필수코스로 투어를 가던 곳도 낙원상가에요. 네 줄로 늘어선 복도를 걸으며 악기들을 테스트해 보고 단골집에서 커피 한 잔 얻어 먹던 정든 곳이죠."

지난 가을에 마지막으로 낙원상가를 찾았다는 이한철은 "주차비가 비싸져서 급하게 볼일만 보고 돌아섰어요. 아, 그런데 곧 사라진다니 아쉽습니다. 기타도 한참 쓰다가 낡아지면 버리고 싶잖아요. 그걸 참고 10년을 보내면 기타가 골동품이 됩니다. 낙원상가도 그럴 수 있는데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 낙원상가, 연주처럼 '영욕 40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284-6. 탑골공원과 인사동 중간에 우뚝 솟은 (건축 당시로는) 거대한 빌딩이 어떻게 음악인들의 낙원이 됐을까.

수백개의 육중한 기둥으로 떠받쳐진 낙원상가 아래로는 창덕궁과 종로를 잇는 4차선 도로가 관통한다. 지금은 하루 종일 차가 붐비지만 40여년 전까지 이곳은 한옥이 옹기종기 모인 주택가였다.

1960년대 서울시는 늘어나는 인구와 교통난을 한꺼번에 해결할 묘안이 필요했고, '불도저 시장'으로 불렸던 김현옥 시장은 도로 위에 주상복합시설을 세우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1967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9월 지상 2~5층의 상가가 완공됐다. 준공 검사를 받기 두 달 전부터, 당시 최첨단 빌딩이던 낙원상가에는 토산품점, 양품점, 학원, 예식장 등이 입주한다. 그리고 지금 허리우드극장 자리에 영화사 '신필름'이 들어섰다. 1969년에는 아파트에 주민들이 살기 시작했다.

낙원상가의 악기상들은 본래 종로 2~4가의 번화가에 있다가 임대료가 싼 이곳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악기상들이 낙원상가를 완전히 점령한 것은 1974년 무렵. 직업 특성상 낮에 별로 할 일이 없던 음악가들에게 낙원상가는 해방구였고 일자리 알선소였다. 대낮부터 시끌벅적 술판을 벌이던 이들을 피해 기존의 상인들은 떠났고, 새로운 악기상들이 찾아들었다.

낙원상가의 전성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밴드문화가 꽃을 피우던 이 시절, 상가에는 300개가 넘는 악기점이 성업했다. 1980년대 말 노래방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낙원상가의 성장세는 꺾이기 시작한다. 낙원상가는 그러나 여전히 230여개 악기상이 영업 중인 세계 최대의 악기 상가다.

유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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