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걸'이니 '오메가보이'니 하는 말이 유행을 타고 있는 요즘엔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역사 이래 여성 호모사피엔스의 평균적 지성은 남성 호모사피엔스의 평균적 지성보다 뒤처지는 것으로 간주됐다. 호모사피엔스의 지성사를 채우고 있는 개체들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이 이런 가정을 그럴 듯하게 뒷받침했다.
교육을 받을 기회가 남녀 사이에 매우 불평등했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심지어 몇 년 전에도, 로렌스 서머스라나 뭐라나 하는 하버드대 총장(최근 오바마의 백악관에서도 한 자리 꿰어찬 모양이다)이 여성의 상대적 지성 결여를 입에 담아 스스로 구설에 올랐다.
사실 하버드대 총장의 '부드러운' 메일 쇼비니즘은, 겉으로 입에 올리지 않을 뿐이지 많은 남자들이 속으로 공유하고 있는 편견이다. 그들은 지성의 전(全) 분야에서는 몰라도, 논리학과 수학 언저리의 자연과학적 자질에서만은 자신들이 여성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여긴다.
그나마 언어를 익히는 능력에 대해선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평가가 상대적으로 너그럽다. 이 너그러움이 우스운 것은,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는 어휘와 규칙을 외우는 기억력만이 아니라, 그 수많은 규칙들을 배열하고 조합하는 논리적 수학적 능력이 적잖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지성의 성적(性的) 불균등에 대한 논란은, 지성의 인종적 불균등 논란과 함께, 정치적 좌우를 가르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했다. 10여 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미국의 리처드 헌스틴과 찰스 머리라는 '과학자'가 <벨 커브> (Bell Curve)라는 책에서 지성의 인종적 차이를 과감히 주장한 적 있다. 벨>
그들에 따르면 인종들의 지성 순위는 아슈케나지(중동부유럽 출신 유대인), 동아시아인, 백인(코카시언), 흑인이라는 것이다. 참, '한가한 과학자'들이시다.
인종은 이 글의 관심 대상이 아니니 성에 대해서만 얘기하자. 여성은 과연 지적으로 남성에게 뒤떨어지는가? 최근 한국의 '교육 시장'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점점 또렷이 드러나고 있다.
특목고(의 사회적 폐해나 교육적 비윤리성은 잠깐 잊어버리자)나 소위 명문대학 입학생들 가운덴 여성의 숫자가 남성을 근소한 차이로 따라붙거나 넘어서고 있다.
사법시험을 비롯한 만만찮은 자격시험이나 행정고시를 비롯한 고급공무원 시험에서도 그렇다. 여성 지원자들은 남성 지원자들과 합격률이 거의 대등할 뿐 아니라, 학업성취(성적)도 눈에 띄게 앞선다.
이런 시험들에 꼭 들어가는 과목이 미분기하학이나 양자역학이 아니고 법학이어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즉 법학은 그저 외기만 하면 되는, 비-창조적 암기과목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모든 학문이 그렇듯, 법학도 암기력을 요구한다. 그 한편, 법학은 형식논리학의 맏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성이 논리 능력에서 남성에게 뒤진다는 것은 거짓말이기 쉽다.
반면 경제형편이 나은 집 아이들이 못한 집 아이들보다 교육성취도가 높다는 사실은 수없이 증명되었다. 그러니까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지적 성취도를 좌우하는 것은 성이 아니라 계급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것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비롯한 여러 관찰자들이 이미 지적했던 바다. 계급은 교육제도를 매개로 재생산된다.
나는 지적 능력이 성에 따라 다른지 여부를 판단하진 않겠다. 어쩌면 공식 역사가 보여주듯, 남성이 본디 더 지적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근의 알파걸 열풍에서 보듯, 다른 조건이 같다면 여성의 지적 성취도가 더 높을지도 모른다.
이런 논의는 본디 확정적 결론에 이를 수 없다. 그야말로 "It depends"(그 때 그 때 달라요)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이 자리에서 나를 매혹한 지적 여자 한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그 여자의 이름은 제인 마플이다.
나는 그녀의 생년도 몰년도 모른다. 아는 것은 그녀가 잉글랜드의 세인트메리미드라는 곳에 살았던, 나이 지긋한 독신녀였다는 것뿐이다.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픽션 속에서. 일반 독자들에게 '미스 마플'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그녀는 아마 작고했을 것이다.
그녀가 아마추어 탐정으로 맹활약을 한 것이 1930년부터 1971년까지니 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추리소설가다.
맞다, 바로 그 미스 마플. 내가 지금 들추고 있는 사람은 벨기에 출신의 사립탐정 에르퀼 푸아로와 함께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주도했던 그 제인 마플이다. 그녀는 크리스티의 장편 12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첫 작품이 <목사관의 살인사건> (1930)이고, 마지막 작품이 <네메시스> (1971)다. 그러나 미스 마플이 독자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76년에 나온 <잠자는 살인> 에서다. 크리스티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쓴 이 소설을 은행금고 속에 보관해 두었다. 잠자는> 네메시스> 목사관의>
독일군의 영국 공습이 일상적이었던 터라, 혹시라도 자신이 이 전쟁을 넘기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것이 크리스티가 작고한 해에 출간되었다. 미스 마플은 크리스티의 단편에도 나온다. 마플이 등장하는 단편만을 모은 <열세가지 문제> (1932)라는 창작집도 있다. 열세가지>
나는 아마, 단편을 빼고는,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대부분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스토리가 머리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은 <쥐덫> 이나 <카리비아해의 미스터리> 를 포함해 얼마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점점 나빠지는 것의 이점 하나는,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어도 여전히 처음 읽는 듯 흥미롭다는 것이다. 카리비아해의> 쥐덫>
그런데 남에게 정보를 전하는 데는 그것이 치명적 약점이다. 그러나 나는 제인 마플이 크리스티 작품 속의 라이벌인 에르퀼 푸아로와 많이 달랐다는 점은 기억하고 있다.
여자라는 점 말고도 말이다. 가장 큰 차이는 푸아로가 주로 이성의 연산에 바탕을 두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나가는 데 비해, 미스 마플은 이성과 경험을 버무리면서 사건을 파헤친다는 점일 테다. 미스 마플은, 추리만이 아니라, 자신의 희미한 기억 속 어떤 사건과의 아날로지를 통해 새로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
두 사람 다 사건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휘말리는 수동적 탐정이지만, 그 '귀차니즘'에서 미스 마플은 에르퀼 푸아로를 앞선다. 마플은 움직이기 싫어하고 생각하기 좋아한다.
초기의 마플은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수다쟁이 할머니(아주머니?)였다. 말하자면 좀 주책이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티 소설 속에 그녀가 거푸 등장하면서, 그녀의 인격은 다사롭고 격조있게 변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살가워지고, 말에 조심스러워진다. 무엇보다도, 전기(前期) 마플과 후기(後期) 마플을 통틀어서, 사건 관련자들의 마음을 읽어냄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마음 읽기는 감성만이 아니라 지성의 영역이기도 하다)은 마플이 푸아로를 앞선다.
머리에 넣고 있는 정보가 지성의 척도라면, 아무 때나 프랑스어나 영어로 고전의 이 대목 저 대목을 인용할 수 있는 푸아로에게 시골 할머니가 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를 면밀히 관찰하고 편견에 휘둘리지 않으며 논리의 회로를 따라가는 것이 지성이라면, 마플은 푸아로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마플은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 약학 지식에서도 푸아로를 앞선다.
두 사람이 닮은 점이 있다. 쉽게 사람을 믿지 않는 것,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너무 쉽게 발견하는 것. 그러나 바로 그것이 위대한 탐정들의 자질일 것이다. 더구나 마플은, 그 타고난 염세주의 속에서도 주변의 몇몇 사람에 대한 애정을 견지한다.
이 너그러운 비관주의자의 스토리는 거듭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돼 관객을 만났고, 마거릿 러더퍼드와 앤젤라 랜즈베리를 비롯한 많은 배우들이 미스 마플 역을 제 경력에 추가했다.
아마추어 탐정 노릇 말고 마플의 유일한 취미가 뜨개질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그녀는 노처녀(spinster)인데, 이 말의 본디 뜻은 '실 잣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가 그걸 의식하고 마플의 취미를 결정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해온 제인 마플의 지성은 바로 크리스티의 지성이었다.
크리스티 팬들의 주장에 따르면, 크리스티의 책들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주장이 크리스티의 팬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1위는 요지부동으로 성경이지만, 2위 자리가 흔히 변한다. 심지어 마르크스도 크리스티의 경쟁자다.
추리소설은 가장 지적인 소설장르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널리 읽힌 추리소설 작가는, 그리고 그녀가 아마도 자신을 투사해 만든 캐릭터는 '여자'다. 자신이 여자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덜떨어진 사내들은 늘 이 점을 가슴에 새겨야 할 테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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