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11시 서울 은평구 진관동 시립은평노인종합복지관 2층 강당. 노인연금 13만원으로 한 달을 사는 할아버지, 신의주에서 월남했다가 부친은 다시 납북 당했다는 할머니, 미국에 있는 손녀를 본 지 10년이 됐다는 할머니….
저마다 가슴 저리는 사연을 지닌 실향민과 홀로 사는 어르신 230여명이 설을 나흘 앞두고 복지관에서 마련한 '합동 차례'를 지내기 위해 모였다.
관절염으로 불편한 다리를 끌고 차례상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숙열(76ㆍ여)씨는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사모곡(思母曲)'을 쏟아냈다.
1ㆍ4 후퇴 때 황해 연백에서 가족을 이끌고 월남한 이씨의 어머니는 시장 좌판이나 공원에서 떡장사를 해 4남매를 키웠다. 이씨는 "그 당시에는 드물게 내가 여고까지 나온 것은 모두 어머니의 희생 덕이었다"고 회고했다.
'현비유인O씨신위(顯孺人O氏神位)'. 합동 차례여서 위패도 성씨 자리를 비워둔 '공동 지방(紙榜)'이 쓰였지만, 따로 위패를 챙겨온 이들도 있었다.
10년 전 한 스님에게서 받았다는 "신령이 깃든" 위패를 제사상에 놓은 이장순(76ㆍ여)씨는 "어머니는 전형적인 가정주부로 어디 여행도 못 가 보셨는데 합동 차례에서 친구 분들을 많이 사귈 수 있겠다"며 흐뭇해 했다.
오랜만에 조상님들께 자손 노릇을 한 이들은 같은 처지 이웃과 어울려 떡국도 먹고, 색동옷 차려 입은 꼬마들의 재롱도 즐겼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제이구요". 인근 개나리어린이집 원생 15명의 '위문 공연'이 펼쳐지자, 어르신들은 오랫동안 못 본 손자ㆍ손녀들을 만난 듯 "아이, 예뻐라"를 연발했다. 개중에는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를 세뱃돈으로 주는 이도 있었다.
은평노인종합복지관은 2005년부터 설과 추석에 합동 차례를 지내고 있다. 고재욱 관장은 "홀로 사는 노인들은 경제적 부담 등으로 차례상 차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면서 "이들에겐 금전적 지원 못지않게 정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할아버지는 "혼자 산다는 게 얼마나 쓸쓸한 건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해방, 6ㆍ25, 산업화를 헤쳐온 우리 세대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장재용 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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