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12월 1일 저녁 미국 앨러배마주 몽고메리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로자 팍스(42)가 백화점 앞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당시 남부에선 버스를 탈 때 백인들은 앞 자리부터 채워가고 흑인들은 맨 뒷자리부터 채워가는 것이 법이었다. 그래서 대강 앞에서 3분의 1 정도 자리를 백인이 앉고 뒤에서 3분의 2 정도를 흑인이 차지하면 만차가 되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또 다른 승객이 탈 때다. 누가 양보하지 않는 한 서서 가는 게 당연하지만, 그 승객이 백인일 경우 흑인 좌석의 맨 앞줄을 비워주는 게 당시 법이었다
▦ 팍스는 흑인구역의 맨 앞 자리에 앉았고 뒤이어 오른 흑인 승객 3명도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얼마 가지 않아 그녀 바로 앞 백인 구역 좌석도 모두 찼다. 그런데 다음 정류장에서 백인 1명이 더 타자 백인 운전사는 팍스의 좌석줄을 향해 "그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비켜주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라고 소리쳤다. 주변 흑인 승객은 머뭇머뭇 일어났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고, 운전사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됐다. "요금을 낸 이상 난 일어날 필요가 없다"며 헌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그녀에게 법원은 벌금형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 "굴복하는 데 지치고 넌덜머리가 났던" 그녀는 당당히 항소했고, 이름없는 그녀의 작은 저항과 용기가 삽시간에 지역사회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반향을 낳았다. 모든 흑인들이 단결해 381일간에 걸친 버스 보이코트 운동을 벌인 것이다. 시 당국과 경찰의 협박과 회유, 마구잡이 검거가 계속됐지만 흑인 사회는 때마침 이곳 교회로 온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지도 아래 줄기차게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이어갔다. 마침내 1956년 12월21일 얼 워런 대법원장이 이끄는 연방대법원은 버스 안 인종분리 규정이 위헌이라며 팍스의 손을 들어줬다.
▦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를 금지한 1954년의 '브라운 판결'과 함께 민권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이 사건의 주인공은 2005년 10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92세 나이로 숨졌다. '한때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녀들이 형제애 넘치는 식탁에 함께 앉기를' 꿈꿨던 킹 목사도 1968년 암살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들의 꿈을 이뤘지만 그 꿈은 끝나지 않고 후세대로 계속된다. "팍스가 앉아 있었기에 킹 목사가 걸을 수 있었고 킹 목사가 걸었기에 오바마가 뛸 수 있었으며, 오바마가 뛰었기에 우리는 날 수 있다." 요즘 워싱턴에서 들리는 미국의 노래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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