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선왕 때인 1308년 6월 천문 관련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을 통합한 서운관이 설립됐다. 서운관은 조선 말까지 무려 600년 동안 지속적인 천문 관측을 수행,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이 방대한 자료를 남겼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자산이다.
서운관(書雲觀)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천문, 역법, 지리, 택일 등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삼국시대에 일자(日者)라고 불리던 천문학자들이 밤하늘을 관찰하던 관청 일관부(日官部)의 후신이기도 하다. 고려 초 이런 업무는 태복감과 태사국이 나누어 맡았다가 1308년 이 둘을 병합해 서운관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1392년 서운관을 설치하였다. 1466년 세조는 서운관의 이름을 관상감(觀象監)으로 바꾸었으나 이후에도 관상감의 별명이 운관(雲觀)일 정도로 서운관이란 이름은 잊혀지지 않았다.
한때 연산군의 분별없는 정책 때문에 관상감이 사력서가 되어 책력 만드는 일만 하게 된 적도 있지만 중종반정 후 다시 관상감으로 복귀해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다.
■ 세계에 유례 없는 천문학적 자산
서운관의 의미는 천문 관측을 맡아본 관청이 안정적으로 60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관상감의 천문학자들이 남긴 가장 귀중한 유산은 바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천변등록> 등에 남아 있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방대하고 꾸준한 천문 관측 자료이다. 천변등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관상감의 천문학자들은 3명이 한 조가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밤하늘을 관찰했다. 한 사람만으로는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식, 월식, 태양의 흑점, 별똥, 혜성, 초신성(超新星) 등 천문 현상이 관측되면 규정에 따라 관측을 하고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라는 짧은 보고서를 작성, 국왕과 세자 및 정승들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사관들이 <승정원일기> 에 기록하게 되며, 나중에 <조선왕조실록> 에 수록된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 현대 천문학 연구의 보고
'성변측후단자'의 원본은 단 3권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이를 토대로 씌어진 다른 역사서들의 천문 관측 기록은 현대의 천문학자들에게 수백년에 걸친 천문현상 연구의 길을 터놓은 관측자료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선조 때인 1604년 <조선왕조실록> 은 새로 나타난 별을 7개월간 130회나 관측한 결과를 쓰고 있다. 이 초신성이 바로 '케플러의 초신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망원경 이전 세대의 관상감 천문학자들은 초신성의 밝기 변화를 금성, 목성 등과 비교하며 놀라우리만큼 정밀하게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
이 정밀한 관측자료를 토대로 1977년 영국의 천문학자 데이비드 클락과 리처드 스티븐슨은 케플러의 초신성의 유형을 알아낼 수 있었다.
천문 기록에 나타나는 것 중 가장 빈번한 건 별똥 기록으로 <고려사> 에 약 700건, <조선왕조실록> 에는 약 3,500건이 있다. 별똥비(유성우)는 혜성이 지나면서 남긴 부스러기들이 지구 대기에서 타면서 생기는 것이어서, 별똥비의 기록을 분석하면 혜성의 출현 빈도나 궤도의 변화 등을 알아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이와 같이 서운관 천문학자들 덕분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과학적 자산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국가가 전문기관을 설립하고 수백년 동안 유지, 지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왕권을 지킨 서운관
조선시대 관상감의 업무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천문학에 속한 관원은 천체에 대한 관측과 책력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풍수학에 속한 관원들은 풍수지리학자들로서 묫자리나 집자리를 잡는 일을 하였고, 명과학에서는 길흉을 판단하여 국가 행사의 날짜를 잡았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의 과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 수도 있지만, 자연을 관찰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현대 과학의 뿌리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시간을 측정하고 책력을 제작하여 그 해에 일어날 일식과 월식을 미리 계산,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이 민심의 동요를 막고 왕권의 탄탄함을 과시하는 작업이었다.
세종대왕 이전에는 중국에서 받아온 책력을 사용했으나, 세종과 천문학자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칠정산(七政算)이라는 자주적인 역법을 이룩했다. 또 앙부일구, 자격루 등을 만들어 국가 시간 체계를 정비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중국식 전통 역법보다 더욱 정교하고 복잡한 서양의 역법과 기계시계 같은 신문물이 들어왔다. 이러한 신학문을 연구하여 서양력인 시헌력(時憲曆)을 시행하고, 진자를 사용한 기계시계인 혼천시계를 만든 것도 관상감 천문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 한국 천문학의 전통과 미래
당시 서운관에서 일하던 천문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이珦뺑? 조선시대에는 대를 이어 천문학자가 되는 일이 흔했다. 공무원으로서 신분이 보장됐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 때인 1759년에 나타난 핼리혜성을 약 30일 동안 관측한 안국빈(安國賓)의 가문은 200년 동안 9대를 이어 관상감 천문학자들을 배출했다. 이 정도의 전통이면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의 명문가들도 울고 갈 정도다.
또한 16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상감 관원이 되는 것을 보면 어릴 때부터 자식들에게 천문학을 공부시켰음이 분명하다. 천문학자들의 신분은 자동으로 세습되는 것은 아니었고, 뛰어난 공을 세우면 높은 벼슬은 아니라도 현감이나 군수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전문성을 높이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뜻이다.
일제시대 잠시 끊겼던 서운관의 전통은 1974년 국립 천문대가 설립되고 현재의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전통이 이어졌다. 삼국시대부터 계산하면 한국 천문학은 훨씬 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지만, 현대 천문학이 시작된 것은 겨우 35년 세월이다.
그 옛날 서운관과 마찬가지로 현재 역서 편찬과 표준시간 정립, 일식과 월식의 예보, 지구측정시스템(GPS) 표준 제공 등은 한국천문연구원의 기본 업무에 속한다.
그리고 현대의 한국 천문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근원적 의문에 과학적인 답을 하기 위해 세계 최대 구경의 25m 망원경을 만드는 국제프로젝트인 거대 마젤란 망원경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서운관 학자의 후예들이 내놓을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안상현·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 하늘 움직임 관측은 국가질서의 근간 역할천문법 제정 속도 기대
국가체계를 정립한 이후부터 천문관측의 업무는 임금에게 속한 일이었고 국가질서를 확립하는 기초였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신라 성덕왕 17년(718년)에 누각(물시계)을 만들고 누각전을 설치했고, 경덕왕 8년(749년)에는 천문박사 1인과 누각박사 6인을 두어 천문관측에 따라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도록 했다. 삼국사기>
농경사회에서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민감했던 이유는 농삿일의 시기를 적절히 파악해야 할 필요 때문이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씨를 뿌리거나 배를 띄워야 할 때를 알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역서를 출판하는 목적이었다.
따라서 하늘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국가 질서를 강화하는 일이자, 하늘의 뜻을 땅에서 실현하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이었다.
가령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일을 제대로 예측해서 민심의 동요를 막고, 날짜와 시간을 표준화해서 생활의 혼란이 없도록 해야 했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민간인이 천문역법에 관한 서적과 기물을 갖고 있거나 역서를 사사로이 만드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역서를 위조하거나 임의로 인쇄하면 사형에 처하는 등 중벌을 내렸다.
정확하고 표준화된 역서를 보급하는 일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현재는 한국천문연구원이 보다 과학적인 관측과 계산을 토대로 역서를 만들고 윤달과 윤초 등을 관리한다.
심지어 폭력사건에 대한 형사처벌에서 범죄시각이 일몰 전인지, 가중처벌되는 일몰 후인지를 계산해 법원에 제출하는 일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천문연구원의 업무는 사실 법적 근거 없이 이루어져 왔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가 근대 이후 전통적인 태양태음력 대신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는 것도 사실 법적으로는 아무 근거가 없다.
한때 민간 달력업자들이 임의로 음력 날짜를 계산하는 바람에 음력 설 날짜에 혼선을 빚었던 일도 있었다. 13일 국회에서 천문법 제정이 발의된 것은 늦게나마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한 결과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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