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를 계기로 경찰에 제대로 된 '집회ㆍ시위 진압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현장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할 수 있는 체계적인 매뉴얼이 있었다면 이번 사건에서처럼 화염병이 난무하고 수십개의 시너통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에 물대포를 퍼붓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시위 현장에서 대형 참사가 끊이지 않았지만 아직 국내에는 제대로 된 시위 진압 매뉴얼이 없다. 경찰은 지난해 8월 140쪽 분량의 '집회시위현장 매뉴얼'을 수첩 형태로 만들어 경찰관기동대, 전의경부대 등에 배포했으나 내용이 부실해 현장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상황별, 단계별 구체적 대응방법은 찾아볼 수 없고, 불법행위 엄정 대처, 현장 관리역량 강화, 현행범 체포 시 미란다 원칙 설명 등 원론적인 내용만 주로 다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매뉴얼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이황우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2007년 한국경찰학회지에 게재한 '한국의 집회ㆍ시위문화 정착방안' 논문을 통해 "경찰이 집회ㆍ시위를 관리함에 있어서 그 권한의 범위, 책임의 한계, 활동의 근거 등이 모호한 것은 일관성 있는 매뉴얼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상원 한국경찰학회 회장은 "1989년 부산 동의대에서 시위대의 화염병 투척으로 경찰, 전ㆍ의경 등 7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면서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 되도록 제대로 된 매뉴얼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매뉴얼은 고공시위, 화염병 투척 시위 등 인명 살상 위험이나 돌발상황 발생 가능성이 높은 시위 현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진압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매뉴얼이 마련되면 '고공시위의 경우 안전매트와 그물망을 이중으로 설치한다' '화염병 투척 시위 때는 시위 진압조 중 몇 명이 대형 분말소화기를 들고 불을 먼저 끈 뒤 진입한다' 등 세부적인 안전조치를 빠짐 없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소 전문가들이 면밀하게 준비한 대응방법을 진압 현장에서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매뉴얼에 의거, 표준화된 대처가 즉각 이뤄지기 때문에 과잉진압 논란도 최소화할 수 있다. 이상원 교수는 "화재, 투신 등 급박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매뉴얼을 통해 즉각 대응이 가능해 지휘관의 능력, 특성과는 상관없이 표준화된 시위 진압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선진국들은 시위 진압 매뉴얼을 이미 10여년 전부터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단계별 진압방법과 돌발상황 발생 시 대처요령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어 진압 작전이 일사불란하게 이뤄질 수 있다.
새로운 시위 방법이 나오면 그에 따른 대처법이 바로 추가된다. 이 교수는 "평상시 매뉴얼을 교본으로 훈련을 하기 때문에 경찰의 대응능력을 크게 높일 수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제대로 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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