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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설/ 콩트 - 父子의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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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설/ 콩트 - 父子의 사업

입력
2009.01.23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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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아버님이, 아버님이…."

무슨 상조회사 광고에 나올 법한 대사가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또 무슨 물건을 집에 들여보냈기에 전화를 했을 것임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결혼해서 분가한 이래 아버지가 이제까지 집으로 보낸 물건은 자석담요, 건강식품, 정수기, 운동기구, 조리기구 등등의 공산품에서 근래의 농산물과 가공품까지 유구한 역사와 다양성을 자랑해왔다. 하나쯤 더 왔다고 무슨 엄청나게 큰일이라고, 아침부터 긴급하고도 비상한 영업회의 중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어라, 울먹거리기까지?

"아 왜 그래 또?"

"정말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아버님, 그리고 당신!"

"글쎄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지금 무지 바빠."

"집에 들어오기만 해봐. 해보라고!"

내가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내려놓자 나를 지켜보던 직원들이 일제히 서류를 뒤적거린다, 뭘 적는 시늉을 한다 하면서 내 시선이 돌아오는 것을 피했다. 그러게도 생겼다. 지난달에 비해 판매실적이 또 10퍼센트 감소했다. 그러니까 6개월 전 실적의 절반이 된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말들은 쉽게 하는데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가 당사자에게 닥치면 그런 말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다.

또 다른 유행어인 '선제적 대응'을 한답시고 위기의 조짐이 보이던 지난 가을, 살던 아파트까지 줄여서 회사에 집어넣었지만 그때 잠깐뿐이었다. 이제는 사람이고 비용이고 더 줄일 데도 없으니 별 수 없이 각자의 집에 가져가는 것을 최대한 줄이고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사장이라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석 달째 평소의 삼분의 일밖에 안 되는 돈으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아내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더 깊은 한숨까지 동반한.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내가 전화기를 소파에 내동댕이쳤다. 결혼 이후 15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아버지가 보름 전쯤 전화를 걸어 "별일 없냐?"고 했을 때 옆에 있던 아내가 평소처럼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기에 무심코 아버지의 요구대로 돈을 보내주겠다고 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아내는 텔레비전을 끄고 "또 얼마나?" 하고 다그쳤다.

"어… 삼십만 원."

"왜?"

그때 내 입에서 거짓말이 튀어나간 게 결정적이었다.

"친구분들하고 부부동반으로 제주도 다녀오신다고."

"참, 요즘 같은 때 어쩌면 그렇게 마음이 편하시대요? 그리고 우리만 자식인가? 왜 그런 좋은 일 생기면 우리한테만 전화를 하셔?"

"아니야. 철호 하고 영희, 윤희가 각각 십만 원씩 내서 어머니 건 부담하기로 했대."

"거짓말 말아요."

"아니라니까. 나중에 선물 보면 알 거 아냐?"

그렇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용돈 받아서 여행을 가면 반드시 여행지의 특산물을 택배로 부치는 사람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인사할 건 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소신, 아니 경영철학이다.

아버지가 전화에서 말한 '전망이 확실한 사업'이란 더덕 농사에 거금 백만 원을 투자하겠다는 것이었다. 매일 빤히 바라다 보이는 산 아래 밭 삼천 평에, 매일 트럭 타고 집 앞을 지나다니는 성실한 농사꾼이 더덕을 잔뜩 심어놓았는데 지금 돈이 바짝 말라 똥끝이 타고 있으니 이럴 때 숟가락을 슬쩍 얹어 놓으면 뒷날 큰 보답이 돌아오리라는 것이다. 빌려주고 이자 몇 푼 받는 게 아니라 과감하게 투자를 해야 몇 배의 투자 수익을 얻을 것이라고도 했다. 매달 보내는 아버지 생활비 겸 용돈 50만 원에 100만 원을 더 보태 송금을 하고 나서 확인해 보니 더덕은 무, 배추처럼 심고 나서 금방 수확을 하는 게 아니라 서너 해가 걸리는 품목이었다. 너도 나도 심는다니 그때 가서 제 값을 받을 수 있을지도 문제고.

농촌의 땅부잣집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자라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세 살 때쯤 서울로 이사해서 살면서 아이들을 키웠고 2남 3녀 중 엇나간 자식이 있는 건 아니므로 자식 농사는 남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말로 짓는 농사에서 아버지를 당할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가기 싫다는 어머니를 끌고 고향으로 간 지 십 년에 친구 따라 시도해본 농사, 아니 영농 사업은 양배추, 고추, 버섯, 허브, 양파, 아스파라거스 등등으로 종류는 다양했으나 결과는 판판이 실패였다. 그 덕분에 아버지의 식구와 사돈, 후손을 합쳐 백여 명이 양파즙과 녹즙은 배 터지게 먹었다.

내가 인터넷 홈쇼핑에 주문한 옥돔이 도착하자 아내는 시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시부모가 정말 엄동설한에 제주도에 부부동반으로 여행을 가셨는지 사실을 확인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 이름으로 배달된 옥돔 꼴이 우습게 되었다. 아내로??가소롭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가증스러웠거나.

아내는 울었다. 평소 눈물이 많다고 하지만 면전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여자를 어느 남자가 이길 수 있을까. 일단 빌었다. 다음날에는 싹싹 빌었다. 사흘째 엉덩이를 쳐든 채 엎드려 빌기 시작하자 피쉬쉬 하고 웃음보가 터지며 겨우 풀렸다.

"그래도 아버지가 노름을 해, 춤바람이 난 적이 있어? 그냥 이런저런 일로 소일하면서 드는 비용이라고 생각하자고."

아내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고 했다.

"왜 부자가 합동으로 거짓말해서 나를 왕따 시키느냐고! 지금 내가 당신 효도를 방해하는 거잖아. 아버님도 그래. 차라리 그 돈 가지고 어머님이랑 몸에 좋은 거 드시고 보일러 좀 더 돌려서 따뜻하게 지내시면 좋지. 왜 그렇게 힘은 힘대로 들이고 자식들한테 못할 말 해 가면서 그런 일을 하시느냐구? 앞으로 나한테 똑같은 짓을 하면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절대 절대!"

내가 학교 다닐 때 학적부에 아버지의 직업으로 써넣은 건 언제나 '사업'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월급쟁이가 되기보다는 사업을 벌이는 쪽으로 나갔고 내 딸도 학적부에 아버지의 직업을 사업이라고 적어넣게 되었다. 아버지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팔아서 먹고 살고 사업가로 행세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이제는 더 팔 게 없어서 자식들에게 사업 밑천을 빌리려는 것뿐이었다. 다만 요즘 형편이 모두 어려운 판이니 늘 해오던 아버지의 행동방식이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어떻든 그냥은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설날 이틀 전, 십여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역귀성을 한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아파트 문을 들어섰다. 지난 가을 이사온 곳이 언덕바지에 세워진 아파트라 마을버스에서 내려서 올라오기가 불편하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다 25층 아파트의 꼭대기층이니.

"아이구, 난 어지러워서 이런 데는 못 살겠다. 시골서 맨 일층에만 있었더니 촌 할마시 다 되어서는…."

어머니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달라진 아파트 때문에 마음이 아픈 듯했다. 어떻든 사업가로 일관하여 평생을 살아온 남편 때문에 단련된 눈치가 9단이다.

"원래 서양에서는 동네 이름에 힐(hill) 들어가면 부자 사는 데거든. 여기는 아파트 이름이 힐보다 높은 고지예요. 백마고지, 개마고원 할 때 그 높은 데란 말이죠."

내가 애써 설명을 하는데 아버지는 부엌으로 자주 눈길을 보냈다. 아내는 얼마 전 사건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 부엌에만 있었다. 마침내 어흠, 하고 아버지가 기침 소리를 내더니 식구들을 불러모았다.

"에미야, 이리로 좀 와보거라. 현진아 너도 여기 와 앉고."

나도 짐작만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몰라 잘 아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학예회 연극 구경을 하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아내는 앞치마를 걸친 채 거실 바닥에 앉았다. 뒤늦게 온 아이는 소파 위에 올라앉고 나는 식탁 의자에 떨어져 앉아서 연극을 볼 태세를 갖추었다.

"내가 한 두어달 전에 문중 행사에 갔다가 말이다. 오래된 문서를 하나 보게 됐지. 요새 한문 아는 사람이 누가 있나. 내가 그거를 갖다가 읍에 한약방 하는 동창놈한테 보여 보니까 아, 그게…"

아버지는 목이 마르는지 현진에게 물을 가져오게 하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게 네 증조할부지 글씨더란다. 한 칠십년 전에 문중에서 선산 터를 하나 장만했는데 사고 나서 보니 길을 내기 힘든 험지라 쓸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네 증조가 당신 산을 문중에 내주고 그 터를 인수한 거라는 내용의 문서더라. 거기에 문중 어른들 도장이 쫙 찍혀 있고. 한데 네 증조가 그 산 명의를 당신 앞으로 옮기지 않고 그냥 돌아가셨거든. 뭐 그 땅은 돈 가치는 별로 없어. 문중에서 이번에 고속도로 나면서 수용된 선산 대신에 그 산을 인수하겠다는 거다. 그래서 요 몇 달 그거 정리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아버지는 옷걸이에 걸린 양복에서 누런 편지봉투를 꺼내왔다. 그러고는 현진에게 먼저 봉투를 내밀었다. 겉봉에는 '진이 학용품대'라고 씌어 있었다. 현진이 어쩌면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받았을 법한 봉투를 열자 그 안에 십만 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다. 아이가 환호성을 터뜨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놀란 얼굴을 한 아내에게 제법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에미야, 네가 남편 하나 보고 시집 왔다가 대책 없는 시애비 때문에 마음 고생한 거 내가 다 안다. 이거 네 시할부지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한복이라도 하나 맞춰 입어라. 미장원서 파마도 좀 하고. 내가 유행도 모르고 해서 그냥 돈으로 가지고 왔다. 그래, 미안하구나, 이것저것 겸사겸사… 다 용서해다오."

봉투에는 '메눌악아 설날 옷해 입어라'라는 글씨가 삐뚤삐뚤 써져 있었다. 아내는 기어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버님, 제가 잘못했어요…."

숙여진 아내의 어깨 너머로 아버지의 왼쪽 눈이 열렸다 닫혔다 했다. "나 잘했지?" 하는 식으로. 저렇게 사소한 비밀조차 오래 간직하지 못하니 아버지가 사업으로 평생 빛을 못 본 게 아닐까. 나는 비판의 칼날을 엄정하게 세운 채 아내의 눈에 띄지 않게 의자를 돌려서 앉았다. 높은 곳에 있는 아파트라 전망은 참 좋았다. 햇빛이 눈부시게 환했다. <끝>

성석제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연세대 법학과 졸업 ▦1986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장편소설 <아름다운 날들> <인간의 힘> , 산문집 <소풍> <농담하는 카메라> 등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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