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백제 사리장엄(舍利莊嚴)에 대한 관심이 높다. 사리장엄이란 무엇인지, 발견된 사리호에 실제로 사리가 들어있는지,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의 정확한 내용과 의미는 무엇인지 등 궁금증이 많다.
불교 용어인 사리장엄은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인 사리(舍利)를 장중하고 엄숙하게 꾸미는 행위 혹은 그 행위의 결과물을 말한다.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장 범하 스님은 "불교의 근본은 사리 신앙이기에 사리를 잘 보존하기 위해 여러 겹으로 보호를 해서 봉안한다"면서 "탑은 바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집"이라고 설명했다. 또 "사리장엄은 당대 최고의 기술과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한 시대 공예미술의 꽃이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리장엄의 핵심은 당연히 사리를 담은 사리기(舍利器). 사리기는 항아리 모양의 호(壺), 병(甁), 합(盒) 등 다양한 형태를 띈다.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발견된 백제 창왕(昌王) 시대 사리기(577년)의 경우 청동 사리함에 작은 은제 사리호를 넣고, 그 안에 실제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병을 집어넣는 세 겹 중첩형식이었다.
이에 비해 이번에 발굴된 사리기는 금제 사리호 내부에 작은 사리병이 들어있는 내외함(內外函)의 이중 구조다.
높이 13㎝, 어깨 폭 7.7㎝의 크기에 보주형(寶柱形) 뚜껑이 덮여있는 미륵사지 석탑 사리호는 상부와 하부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부에 소형 사리병을 안치한 뒤 상부를 조립해 완성했다.
뚜껑과 목에는 연꽃잎, 몸체에는 인동과 당초 무늬를 배열하고 여백에는 둥근 연주(聯珠) 무늬를 빼곡히 새긴 정교한 공예품이다. 보주형 뚜껑을 열어보면 여러 개의 구슬과 함께 내부 사리병의 뚜껑 부분으로 추정되는 금제 표면이 보인다.
그러나 X선 투시로 존재가 확인된 내부 사리병의 모습과 내용물을 직접 보는 것은 쉽지 않을 듯하다. 사리호의 입구가 좁아 사리병을 꺼내려면 상부와 하부를 분리해야 하는데, 그러다 자칫 유물이 파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사리호의 상부와 하부 이음매 부분에 미세한 못 자국이 4개 있는 것으로 볼 때 상부와 하부를 맞물리게 해놓고 구멍을 뚫어서 못을 끼워넣은 리벳 구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면서 "못을 빼는 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내시경을 넣어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내함의 모양이나 사리 유무 확인보다 유물 보존이 가장 중요하기에 신중을 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함께 발견된 사리봉안기에서 백제시대 왕후를 배출한 것으로 밝혀진 '사택(沙宅)'씨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택은 백제 8대 성(姓)의 하나로, 의자왕 때의 비석인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를 남긴 가문이다.
한자를 빌려와 음을 표기했기 때문에 봉안기의 원문에 쓰인 사탁(沙탁)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택(沙宅, 砂宅) 외에도 사타(沙타) 등 다양한 표기가 나타나고 있지만, 모두 같은 발음에 대한 표기다.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했던 장수 사타상여(沙타相如) 역시 같은 가문이다.
사리봉안기를 판독해 해석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당초 특정 주체 없이 제3자의 발원문으로 해석했던 데서 왕후를 주체로 한 1인칭 발원문으로 해석을 정정했다. "전체적 맥락은 다르지 않지만, 훨씬 의미가 뚜렷해진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으로 해석했던 '我百濟王后' 부분을 '나 백제 왕후는'으로 바꿨고, '또 원하옵나니 왕후의 심신은'으로 번역했던 '又願王后卽身心' 부분도 '또 원하옵나니 왕후 나 자신은 마음이'로 고쳤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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