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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서동 이야기 논란 가열/ "역사적으로 볼때 허구" "선화공주, 무왕의 또다른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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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서동 이야기 논란 가열/ "역사적으로 볼때 허구" "선화공주, 무왕의 또다른 왕비"

입력
2009.01.2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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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로 1,400여년 동안 전해졌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그저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ㆍ보수 과정에서 '기해년(639년)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했으며, 백제 왕후는 백제 관리인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는 내용을 담은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발견됨으로써 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도전에 직면했다.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와 함께 우리 전래의 대표적 사랑 이야기였던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심지어 이야기의 배경인 익산 지역에서는 실망감이 너무 커서 "패닉 상태"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 삼국유사의 기록은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훗날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이 되는 소년 서동(薯童)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善花公主)를 얻기 위해 노래를 지은 뒤 저잣거리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전해지는 현전 최고(最古)의 향가 '서동요'다.

<삼국유사> 제2권 '무왕조(武王條)'는 향가와 함께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무왕의 탄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선화공주와의 결합 및 왕 등극을 거쳐 미륵사 창건으로 이어진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중 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난 것을 보았고, "이 곳에 절을 세워달라"는 왕비의 청에 따라 미륵사를 지었다는 것.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웠고,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象)을 만들었으며 회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미륵사 창건을 청원한 왕비가 선화공주라고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당연히 왕비는 선화공주로 보인다. 진평왕이 공인(工人)을 보내 절 창건을 도왔다는 부분도 이를 뒷받침한다.

■ 서동 설화는 지어낸 이야기?

그간 학계에는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후대에 지어낸 설화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삼국통일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던 백제와 신라 왕실이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역사적 배경을 볼 때 '서동요'를 비롯한 <삼국유사> 의 관련 기록은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5세기 말에만 해도 백제 동성왕이 신라 고위관료의 딸을 왕비로 맞는 등 잠시 동맹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554년 관산성 전투 패배로 백제 성왕이 신라의 노비에게 살해당하는 치욕을 겪은 후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돼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7세기 들어 잠시 사신이 오가는 등 교류는 있었지만, 워낙 원한이 깊어 혼인 동맹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통해 이런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삼국유사> 자체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고려 후기 승려 일연(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 는 정사라기보다는 설화 풍의 야사다. 미륵사 창건 부분만 봐도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못을 메웠다고 돼있는 등 사실과는 거리가 먼, 문자 그대로 설화의 성격이 농후하다. 또한 삼국통일 후 수백년 뒤에 쓰여졌기에 신라의 시각으로 왜곡됐을 수도 있다.

■ 무왕에게 여러 왕비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발굴이 <삼국유사> 의 내용을 무조건 불신하거나 선화공주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미륵사의 실제 모습과 <삼국유사> 기록이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용화산 아래라는 구체적 장소의 일치 ▲못을 메워 만들었다는 절터가 실제 저습지인 점 ▲미륵삼존을 보고 회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는 기록과 실제 세 개의 사찰이 모인 삼원병립식(三院竝立式) 구조가 일치하는 점 등이다.

<삼국유사> 의 내용에 일부 보태진 점이 있을지언정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이번 사리봉안기 발굴은 서탑(西塔) 해체ㆍ보수 과정에서 나온 것일 뿐, 동탑지 등 미륵사 전체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미륵사 중원터에서 기축년(629년) 도장이 찍힌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미뤄 중원이 먼저 만들어지고 동쪽과 서쪽 사찰은 이후에 완성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무왕이 선화공주 외에 다른 왕비를 두었고, 이번에 발굴된 서탑과 서쪽 가람만 사택씨 왕후가 지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무왕의 재위 기간이 40년이 넘는 만큼, 첫 왕비인 선화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 백제 귀족의 딸을 새 왕비로 들였거나, 혹은 동시에 여러 명의 왕비를 뒀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노 교수는 외교적 적대 관계였던 신라와 백제가 사돈을 맺고, 유독 무왕 관련 설화가 생겨난 것에 대해 "무왕이 몰락 왕족 출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는 견해를 밝혔다.

무왕의 선왕인 법왕이 즉위 2년 만에 사망하자 귀족들이 세력 기반이 없는 서동을 옹립했으며, 왕이 된 서동이 왕권 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라 왕녀와 결혼해 일시적 화평 관계를 맺는 동시에 외척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리라는 추측이다.

<삼국사기> 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 는 용의 아들이라고 적는 등 무왕의 실체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 '사리봉안기' 해석, 다른 가능성 있나?

이번에 발견된 서탑 사리봉안기의 결정적 자구인 '나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라는 부분을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제기됐다.

그러나 문화재청 의뢰로 사리봉안기를 번역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왕후 스스로를 이르는 1인칭이 분명하며, 그렇게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못박았다.

이렇듯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 발굴로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아무튼 그 과정은 신라에 비해 자료가 부족해 조명을 받지 못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중이 한층 가깝게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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