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 고용이 현실화하면서 정부 안팎에서 '일자리 나누기(잡 셰어링ㆍjob sharing)'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환란 이후 최악의 고용 한파가 우려되는 상황인 만큼, 고통을 분담하는 일자리 나누기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평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구호가 아니라 그에 걸맞은 내용이다. 일자리 나누기라는 큰 틀에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실제 적용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적지 않다. 특히 정부가 일방통행 식의 일자리 나누기를 밀어 부치는 경우, 노사 갈등만 더 부추길 소지가 많다는 지적이다.
■ 안일한 정부 인식
15일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의 화두는 일자리 나누기였다. 이날 거론된 잡 셰어링 방식 중 하나는 대졸 초임을 낮추자는 것.
김기환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공기업이 먼저 대졸 초임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한번 검토해 보자"고 답했다.
정부의 발상은 대졸 초임을 낮추게 되면, 기업들이 그 돈으로 새로운 인력을 더 채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 마디로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아주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발상"이라고 일축했다. 정부의 고용 대책이라는 것이 기존 시스템은 손 대지 않은 채 대졸 초임을 줄이고 청년 인턴을 늘리는 등 편한 방법만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 연구위원은 "가뜩이나 일자리의 질이 열악해지고 있는데 대졸 초임이 높은 청년층이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하다"며 "단지 임금 수준만 낮아질 뿐, 정부 의도처럼 채용 확대로 이어지긴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노동 강도는 여전한데 임금만 줄어든다면 그것이 무슨 일자리 나누기냐는 항변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근로자들에게 고통만 전가할 뿐, 일자리 나누기는 없을 거라는 얘기다.
■ 여전한 노사 불신
최근 하이닉스반도체 등 일부 기업으로 일자리 나누기가 확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 노조와 기업들은 일자리 나누기에 상당한 불신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노조는 "기업들이 일자리 나누기를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다"며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예컨대 공식 근무시간은 줄어들더라도 시간 외 근무 등이 늘어나면서 실질적인 근로시간 단축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 한 노조 관계자는 "임금만 줄어들고 실제 근무시간은 변함이 없다든지, 임금은 임금대로 줄고 해고는 해고대로 강행하는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기업들 입장에서 일자리 나누기는 곧 비용 증가로 여겨진다. 한 사람이 10시간 일하던 것을 2사람이 5시간씩 일한다고 해도 임금을 절반으로 줄이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자리 나누기로 채용이 확대되면 교육과 훈련에 드는 비용이나 사회보험료 부담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한 대기업 임원은 "상징적인 의미로는 일자리 나누기가 바람직해 보이지만, 기업 입장에서 실제 적용하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평했다.
■ 공감대와 신뢰가 관건
때문에 지금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 부치는 방식은 곤란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우선 노ㆍ사ㆍ정 간 신뢰가 쌓이고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자리 나누기가 정착되려면 노ㆍ사ㆍ정 대타협을 위한 주고받기가 필요하다"며 "대통령이 나서서 임금을 줄이라고 강제를 하면, 오히려 역풍만 부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부자들에겐 대대적인 감세를 해주면서 근로자들에게는 임금 삭감을 강요하느냐는 식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자리 나누기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려면 양적 팽창 위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강 교수는 "의사가 기침을 하는 환자에게 기침을 멈추는 약을 처방하는 것이 당장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짚어보는 게 더 중요하다"며 "이번 기회에 몇몇 소수 위주의 성장이 전체 파이를 키워 분배로 이어진다는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잡 셰어링' 기대 효과
고용 대란을 눈 앞에 둔 현실에서 일자리 나누기는 불가피한 대안으로 보인다. 노사 양측 모두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지만, 양측이 접점을 찾아 성공적으로 정착한다면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우선 경기 사이클에 따라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대량 해고, 이에 따른 사회적 불안감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인력을 자르지 않고도 경기 불황을 넘길 수 있는 해법이 마련된다면, 경기 사이클과 무관하게 사회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이는 사회적인 비용을 대폭 줄이는 결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특히 향후 경기가 회복이 될 때 일자리 나누기의 효과는 배가된다. 불황 때 인력 감축을 한 경우 경기가 회복되면 훈련이 전혀 안 된 인력을 새로 채용해야 하지만, 일자리 나누기로 위기를 극복한 경우엔 훨씬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일자리 나누기가 성공한다면 노사 간 신뢰도 한층 깊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 독일에서 일자리 나누기의 한 방식으로 사용한 '근로시간 구좌제'는 경기가 좋을 때 추가로 일한 근로시간을 비축해 뒀다가 경기가 나빠졌을 때 줄어든 근로시간만큼 사용하는 제도.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런 방식의 일자리 나누기가 성공한다면 노사 간에 상당한 믿음이 구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직업 교육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대폭 줄어들 수 있다. 일자리 나누기가 없었다면 직장에서 쫓겨나 비효율적인 직업 훈련을 받았어야 할 이들이 직장 내에서 효율적인 교육을 받는 셈이기 때문이다.
일자리 나누기로 근로시간이 줄어든다면 근로자들의 문화 생활 등도 한결 여유로워질 것이라는 평가다.
● 시스템 정착 방안
"일자리 나누기가 필요하다"고 정부가 아무리 강조해본들, 기업과 노조가 외면한다면 소용없는 일. 결국 정부의 역할은 일자리 나누기가 자율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정부도 일자리 나누기를 한 기업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상태. 전문가들은 "일자리 나누기를 하는 기업과 근로자에게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준다면 참여하는 기업들이 대폭 늘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가장 필요한 것이 세제 지원이다. 일자리 나누기에 따라서 기업이 입는 손해, 근로자들이 겪는 소득 감소 등을 보전해준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탓이다.
일자리 나누기를 시행하는 기업들에게 일정 부분 법인세를 감면해주는 방안, 신규 채용에 따른 인건비 상승분에 대해 일정 비율 세액 공제를 해주는 방안, 임금 삭감에 합의한 근로자에게 근로소득세를 감면해주는 방안 등 다양한 세제 지원 방안이 검토될 수 있다. 이밖에 세무조사를 유예한다든지, 세금 납부 기한을 연장하는 등의 혜택도 검토될 수 있다.
물론 과도한 세제 지원에 따른 재정 부담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 하지만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사 인력을 늘리기 위해 과도한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붓느니, 기업에 안정적인 일자리 유지를 위한 세금 지원이 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책자금 지원도 적극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 권영준 경희대 경영학부 교수는 "일자리 나누기 실천 기업에게 장기 저리의 정책자금을 우선적으로 지원해주는 방안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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