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부터 가게를 열면 뭐 합니까, 여태껏 낙지 한 마리도 못 팔았는데. 명절 대목이요? 벼락 맞을 소리 하지 마세요."
설 대목을 일주일 앞둔 19일 오후 2시, 서울 제기동 경동시장에서 해산물과 생선을 파는 충남해물의 김영기(57) 사장은 "설 대목 경기가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경동시장은 물건 값이 싸기로 유명한 국내 대표적인 재래시장.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고객들로 1980~90년대에는 큰 호황을 누렸다.
김 사장은 최근 경기가 어려운 것을 감안했지만, 그래도 설 특수를 기대하며 잔뜩 쌓아놓은 해산물이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다. "저기 말라 비틀어져가는 생선들 좀 보세요. 모두 내 자식 같은 놈들인데…." 김 사장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연신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서민경제의 바로미터인 재래시장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대목 중에 대목인 설 명절이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과거와 같은 '특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경동시장에서 30년째 호도와 잣, 땅콩 등을 취급해온 성보상회 오광수(59) 사장은 "작년까지만 해도 이맘 때쯤이면 설 선물세트 주문들이 쏟아졌는데, 올해는 전화 한 통 결려오지 않는다"면서 "가게를 찾는 손님들도 절반 이상 줄었고, 그나마 마진이 거의 없는 값싼 외국산 제품만 사간다"고 전했다. 이 곳에서 거래되는 국내산 호두는 1㎏에 3만원, 국내산 잣은 600g에 2만8,000원인 반면, 미국산 호두는 1만원, 중국산 잣은 1만6,000원에 불과하다.
구매력이 강한 20~30대 젊은 층들이 대형할인점이나 인터넷몰을 애용하는 것도 재래시장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요즘 자동차 없이 시장에 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주변을 보세요. 주차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관할 구청에 몇 번이고 환경 개선을 요구해도 소용이 없어요. 물건을 싸게 팔면 뭐 합니까. 주변 환경이 이 모양인데요." 2대째 경동시장에서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삼성쌀상회 권오준(53) 사장은 이렇게 분통을 터뜨렸다.
실제 소상공인들의 체감 경기는 사상 최악이다. 중소기업청 산하 소상공인진흥원이 최근 2,010개 소상공인 사업체를 대상으로 경기동향을 조사한 결과, 소상공인들의 업황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2008년 1월 79.3에서 같은 해 11월 52.7로 급락했다. 소상공인진흥원 관계자는 "아직 집계 중이지만 올해 1월 체감경기는 2002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50.0 이하로 내려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내수경기 진작과 함께 소상공인들이 자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중소기업연구원 전인우 박사는 "경기 침체가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 안정의 기반이 되는 소상공인들의 생존권 보장은 매우 중요하다"며 "정부도 지금처럼 단편적인 자금 지원책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소상공인들이 공동구매와 같은 협업화를 통해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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