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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상상력이 무색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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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상상력이 무색하게도

입력
2009.01.20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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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세계지도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서 사용한 점토판에 새겨진 지도이다. 원반 모양의 중심에 바빌론이 그려져 있고, 그 주위에 몇 개의 소도시가 있다. 페르시아 만 북쪽 산맥에서 흘러나온 유프라테스 강이 육지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로 흘러 들고, 그 바깥쪽에는 일곱 개의 미지의 대륙이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 지도는 사실로서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 세계의 존재를 믿고 있는 사람들의 산물이다.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는 일곱 개의 미지의 대륙을 상상하여 채워 넣은 것이다. 이 지도와 같이 상상력에 의해 확장된 세계지도는 근대 이전의 문명권에서 만들어진 많은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상하는 거의 모든 것이 현실이 되었거나 조만간 현실이 될 것이 분명한 현재의 과학기술로서는 보지도 못한 세계를, 단지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 상상해서 그린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도의 발전에 있어서, 나라별 국경선을 표시해 구분한 평면적인 지도 역시 곧 종말을 맞을 운명이거나 어쩌면 이미 종말을 맞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은 거리를 걷고 있는 행인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지 빼고 있는지, 횡단보도의 백색 선이 몇 개인지, 거리에 늘어선 상점 간판의 글씨가 검정색인지 파란색인지 하는 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입체 지도의 세계까지 도달해 있으니 말이다.

여행을 떠나 집이 그리울 때나 집으로 돌아와 여행지가 그리울 때면 인터넷 웹 사이트 구글이 제공하는 입체 지도의 덕을 톡톡히 봤다. 클릭 한 번으로 검은 우주 공간에 푸른 점으로 존재하는 지구에 가까이 다가가 대한민국 서울을 찾고 이내 익숙한 아파트를 발견했을 때는 마치 집이 코앞인 듯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여행을 하며 머물렀던 다른 나라의 도시를 찾아보았다. 역 주변의 상점가, 한밤에도 불을 밝힌 사무용 건물들, 타워가 보이던 사거리, 만(彎)을 가로지르는 다리까지, 입체 지도는 내가 그리워하는 곳을 상세한 사진으로 간단히 안내해 주었다. 편리함이나 정확도 면에서 평면 지도를 간단히 압도했다.

점강법으로, 우주의 한 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도시에 접근하는 입체 지도를 통해 우주란 넓고도 넓어서 나의 세계는 티끌만한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실감했다. 또한, 모호하고 희미한 추억의 영상 대신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며 확정적인 형상을 얻었다. 마음과 달리 좀처럼 어디든 쉽게 떠날 수 없는 나로서는 가보지 않은 도시에 접근하는 가장 편리하고 간단한 방법이 생긴 셈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씁쓸했다. 입체 지도의 세계에서 미지의 것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백일하에 훤히 드러나게 마련이며,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물질적 형상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영역 너머를 상상할 일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상상하는 대신 간단히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니까.

고대인들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을 만한 것도 점차로 사라지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형상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이제는 달이나 화성까지도.

보이지 않는 것,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이해하려는 마음, 그것이 곧 상상력이다. 그러니 투박하게 상상력은 여백에서 나온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은 정보가 너무 많다. 그 탓에 점점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것이 무색해지곤 한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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