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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1> 조각가 전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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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1> 조각가 전뢰진

입력
2009.01.20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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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전뢰진(81ㆍ홍익대 미대 명예교수)씨의 지하 작업실은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다. 어설픈 연탄난로에서는 매캐한 가스 냄새가 코를 찌르고, 찌직대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바깥 소식을 열심히 실어나른다.

복고 코드는 그의 작업 도구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그는 도로공사에 쓰는 착암기로 돌에 구멍을 뚫고, 정으로 쪼아가며 모양을 다듬는다.

머리에는 보호대를, 얼굴에는 돌가루 방지용 안경을 쓴다. 렌즈는 작업 중 금이 가 굵은 줄이 나 있다. 그나마 돌 가르는 톱, 콤프레서 등이 문명의 이기일 뿐이다.

그는 전북 익산에서 실어온 0.5톤짜리 대리석 원석을 상대로 4개월째 씨름중이다. 삶의 버거움에 휘둘려 극단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낯설지 않은 요즘, 이 돌 조각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 이번에도 모자상인가.

"그렇다. 아들과 딸, 두 명의 아이와 어머니를 중심으로, 음악 부호를 포도 넝쿨에 걸쳐 분위기를 살렸다. 배경은 아예 구멍을 ?W어(透刻ㆍ투각) 처리했다.

'낙원 가족' 또는 '선경(仙境) 가족'이라는 가제를 붙였는데, 남녀 조각상 '유영(遊泳)'과 함께 가을에 공개 예정이다. 모처럼 갖는 신작 전시회라 기대가 크다. 아직까지는 아무 것도 떨어져 나간 게 없으니, 순조로운 출발이다."

- 부산 태종대 벼랑의 '자살바위'에 세운 작품 역시 모자상 아닌가.

"1975년 당시 부산시장이 홍익대 건축자문위원에게 '자살이 많아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나의 모자상을 추천받은 부산시가 적극 동의했다. 당시 집이 좁아 충분한 작업공간이 없어, 마루를 뜯어 4개월 동안 작업했다.

이후 자살 기도자들의 에피소드가 속출했다. 한 사람이 '(조각을 보니) 어머니 생각 나 못 죽겠다'며 지서에 가서 사실대로 말하고 여비를 얻어간 게 처음이다. 이후 자살 생각을 거두고 감사의 뜻으로 주소를 남겨놓고 간 여자 등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하던 대로 모자상을 만든 것인데 결과적으로 자살을 방지한 셈이다. 당시 언론은 한 해 30명에 달하던 자살자를 없앤 공신이라며 추켜세우기도 하더라."

- 살기 힘들다고 자살까지 하는 세태를 어떻게 보나.

"일순간의 생각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짓는 행위일 뿐이다. 사람은 최대한 살아봐야 한다."

- 국산 대리석만 쓰는데.

"당시도 익산 대리석이었다. 나는 연마 과정을 거쳐야 하는 외국 대리석은 안 쓴다. 연마하지 않는 대신, 은은한 빛이 감도는 익산의 대리석을 애용한다."

- 40여년 일관된 주제와 기법을 추구해 왔다. 작품 소재는 어떻게 찾나.

"자다가, 산보하다가, 버스 타고 가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스케치해 둔다. 그 다음, 돌에 맞는 스케치를 선별한다. 어린이, 토끼, 아이 젖 먹이는 엄마, 기차 타고 가다 조는 노인, 빨래 거는 모습 같은 것들이 그 내용이다.

나의 예술은 일상에 대한 철저한 긍정의 결과다. 오늘 새벽에 밖으로 나가다 보니 달이 송편처럼 건물에 걸려 있길래 '옥상에 걸린 송편'이라고 메모해 뒀다. 이런 감정이 조각으로 어떻게 승화될 수 있을까 하는 숙제거리를 하나 얻은 셈이다. 자신의 감정을 제3자에게까지 확산시키는 작업이 예술이다."

- 돌조각이라는 힘든 작업을 자신의 과제로 택하게 된 것은.

"26살(대학 3학년) 때 반도호텔 분수를 제작하면서 정이나 망치 쓰는 법을 처음으로 석공한테서 배웠다. 이후 굴러다니던 대리석 조각을 다듬어 미술협회 전람회에 냈더니,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문시 선물용으로 갖고 가면서 알려지게 됐다.

곧 경무대에 내 작품이 전시됐고, 당시 미 국무성은 대학 등지를 통해 나에 대한 신원조회까지 하는 등 무지 신경 쓰더라.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주위로부터 '돌조각만 하라'는 권유가 쏟아졌다. 나도 흔쾌히 수락했다."

- 일반과의 괴리가 심한 현대 예술은 어떻게 보는가.

"예술의 관건은 자신의 감정을 제3자도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소통은 배움에 앞선다. 진정한 예술이라면 특별한 장치 없이 절로 이뤄지는 소통 행위를 궁극으로 삼아야 한다. 의식의 개입 없이, 만들어가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좋은 것이다."

- 최근 상복이 터졌다.

"지난해 12월 한국미술협회가 주는 '올해의 미술인상' 특별상, 지난 5일에는 '자랑스런 홍대인' 상 등을 잇달아 받았다. 올해의 미술인상은 제자들 많이 기르고 작품활동도 계속하고 있다며 주더라. 그런데 홍익대에서 주는 상은 구체적이었다.

돌 작품에만 집중, 홍익대 출신으로는 최초로 예술원 회원이 됐다는 이유다. ダ皐떠▥?신년교례회에서 수상 결정 사실을 연락 받았는데, 내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이다. 고맙지만 젊은 사람에게 돌아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자신을 '적극적으로' 평가해 달라.

"그게 안 된다. 천성인가 보다(웃음). 제자들도 '선생님이 너무 겸손하시니, 우리까지 기 죽는다'고들 한다. 옛날 나더러 홍대 학장 해 달라는 권유가 온 적 있는데 사양했다. 학생은 모르겠는데 선생 다스리는 건 정말 못 한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고 고사했다. 그랬으니 이제껏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식구들은 나더러 항상 답답하다고 말한다. 무시하면 무시당하지, 뭐. 그게 마음 편하다. 천성이다."

- 돌조각이 갈수록 낯설어져 가는데.

"미술계에서는 돌조각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긴 제작 과정, 난이도 때문에 젊은 학생들은 무턱대고 기피한다. 그러나 돌 작품만이 갖는 매력이 있다. 오래 가고 일체의 산화, 부식도 없다. 특히 한국 화강석의 영구성에는 깊은 매력이 있다.

한국인의 어수룩함, 무던함 등을 가장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소재다. 요즘은 조각이라 해놓고, 플라스틱이나 철판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은 현실이다. 그러나 플라스틱 같은 소재가 아무리 새로 나온들 돌조각의 개성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것을 하고 싶어서 하니 나는 얼마나 복된가."

- 돌조각의 전망은 어떻게 보나.

"힘들기만 한 돌조각을 왜 하느냐, 노력에 비해 대가 적다며 꺼리는 교수들이 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쓸모 있다. 적어도 돌조각을 하면 하다못해 막일도 능히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다."

-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매일 새벽 5시30분 기상, 산보, 6시 샤워, 세 차례(오전 7~8시, 오전 10시30분~오후 1시30분, 오후 4~5시) 작업을 이어 오고 있다. 나는 앉아있을 수 없다. 돌 작업이란 한꺼번에 못 하는 법이다.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해야 한다. 행여 많이 쉬면 다음 작업 때 훨씬 더 피곤해진다."

● 돌은 내 운명/ 따스함 감도는 돌조각, 세상에 보인것에 보람

그의 돌조각은 무심히 세상을 쳐다본다.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삼성동 무역회관의 '선경 가족', 명동 입구 외환은행의 '낙원 가족', 남산터널 입구의 '독수리탑'. 서울에 세워져 있는 그의 작품들이다.

한양대 본관 앞을 지키고 있는 돌사자상 역시 그의 작품이다. 포효하는 사자의 이빨에 눈독을 들인 학생들의 성화 때문에 이빨만 뗐다 붙이는 수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산한 한국 현대사를 견뎌온 그의 세월은 돌의 표정을 닮았다. "단기 4282년(서기 1949년ㆍ그는 단기를 고집했다) 서울대 미술대 도안과 입학했는데, 등록금 내자 6ㆍ25가 터졌어요. 수복 후 서울대 갔다가 홍익대로 편입해 조각의 길로 들어선 거죠." 하필이면 시대에 뒤처지는 석조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이런 식이다. "작품이 솔솔 나가니, 재료값은 나와요."

요즘 세태도 그에게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돌조각은 복제는 아예 안 되고 완성에 시간이 너무 걸리고 깨지면 망치니 요즘 학생들은 아예 안 하려 들죠." 그러나 그는 자신과 돌의 인연은 '운명적 필연'이라고 본다. "몸도 약한데다 남하고 경쟁 안 해도 되니, 돌을 택한 데 감사 드립니다."

그의 인간관계는 질박하다. 교수 시절 제자들과 두터운 친교를 맺기로도 유명했다. 지금은 어엿한 조소과 교수이면서 정초 때 세배를 거르지 않는 고정수 강관욱 김영복 한진섭씨 등과의 관계는 사제지간 이상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석공들과의 교분이다. 돌을 직접 가공하는 사람들과의 공동작업이 필연적인 일의 특성상, 그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빠뜨릴 수 없다. 그들이 어울려 "얻어먹으러 왔습니다" 하고 들이닥치면 별 수 없다.

그가 그런 석공들과 함께 세계 석공예대회에서 10연패를 이끌어낸 힘이 거기서 나온다. 미술계에 있지만 그가 철탑, 석탑산업훈장 등 기능인에게 주는 상을 수상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스한 돌조각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점, 자살을 막았다는 점이겠죠." 그가 꼽는 자신의 업적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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