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다락방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뛴다. 작은 창가에 놓여 있던 앉은뱅이 책꽂이에는 다락방의 주인인 내 바로 위의 언니가 애지중지하는 책들이 쪼로록 꽂혀 있었는데, 어느날 그 가운데 한 권이 내 차지가 되었다. 큼직한 그림이 그려진 책으로, 이미 그런 책을 뗄 나이가 지났던 언니가 나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그 책은 곧 나의 보물 1호가 되었다. 글자를 몰랐던 나는 언니가 읽어준 내용을 기억해 두고는 책을 보고 또 보았다. 사이좋은 얼룩말 가족이 어느날 들판에 무리를 지어 소풍을 갔다가 퓨마를 만난 이야기였는데, 나무 위에 있던 퓨마가 얼룩말 일행을 덮치는 바람에 아기 얼룩말이 위험해지자 어미 얼룩말이 아기 얼룩말을 살리려고 애쓰다가 퓨마에게 잡아먹힌다는 내용이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몹시 마음이 불편하고 슬펐다. 아기 때문에 어미 얼룩말이 잡아먹히면 나도 같이 죄송했고, 엄마를 잃은 아기 얼룩말은 이제 어떡하나 싶어서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책은 어린 내 영혼을 뒤흔들었고, 나는 책에 나온 내용이 거짓이기를, 아니 아예 없었던 일이기를 바라면서, 퓨마가 어미 얼룩말을 잡아먹는 부분을 부러 건너뛰며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미 얼룩말을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아이들 책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내 뜻대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바꿀 수도 있다. 나는 책을 쓰면서 마음속으로 이야기의 수신자를 찾아 헤매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공상한다. 내가 쓰는 이 책이 어딘가에 살고 있을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어떻게 다가갈까? 나의 책은 아이들에게 무엇일까? 내 책도 그 어린 영혼을 뒤흔들게 될까?
공상 속에서, 또 현실에서, 나는 수많은 '어린 나'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해받을 때마다 무한한 고마움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연대감을 느낀다. 덕분에 나는 쉬고, 위로받고, 또 용기를 얻어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나간다. 내 책이 누군가 어린 영혼을 뒤흔든다면, 기왕이면 위로와 용기로 남았으면 좋겠다.
강무홍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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