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지음/랜덤하우스 발행ㆍ293쪽ㆍ1만2,000원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그런 풍경을 다시 보게 될 때, 우리 몸의 일부가 갑자기 격렬히 반응한다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108쪽)
소설가 김영하(41)씨는 나이 마흔에 많은 것을 이룬 사내였다. 국립예술대학의 교수였고, 다섯 권의 장편소설과 세 권의 단편소설집을 낸 중견 소설가였으며, 라디오 문화프로그램의 진행자였고, 권위있는 문학상들을 잇따라 받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된 서울의 아파트와 근사한 오디오시스템을 갖춘 승용차까지, "한 마디로 부족한 게 없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일상의 권태감을 도락처럼 즐기고 있던 그. 불현듯 '자기 안의 어린 예술가를 구하라'라는 주제의 강의를 하다가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 안의 어린 예술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쫓기듯 학교에 사표를 던진 그는 서울 살림살이를 정리해 1년간 캐나다로 떠나기로 한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는 김씨가 캐나다로 들어가기 전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머물며 남긴 기록이다. 네가>
뜨거운 태양과 지중해의 푸른 바다, 신전과 원형극장, 밤늦도록 떠들썩한 사내와 아낙들… 풍정도 인정도 그지없이 낙천적인 시칠리아에서 그는 두고 온 한국에서의 나날들을 생각한다. 주민들 '모두가 모두를 잘 아는' 그래서 밤까지 노상카페의 불이 꺼지지 않는 리파리 섬을 거닐며 그는 방에 들어박혀 인터넷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데 빠져있는 서울 사람들의 격절감에 대해 탄식한다.
시칠리아 산골의 한 농장 식당에서 도살한 양의 목을 꿰어 걸어놓기 위한 갈고리를 발견하고는,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부대에서 지휘관의 애견을 잡아먹던 농촌 출신 병사들의 기억과 '일상 뒤에 태연히 자행되는 살육'을 떠올리기도 한다.
여행을 통한 김씨의 내적 성찰가 한번쯤 우리 일상을 돌아볼 여지를 준다. 그는 낡은 것 같지만 여전히 유효한 여행의 목적, 즉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이 두달 반 동안의의 여행에서 실현한다. 시칠리아를 떠날 무렵 한 항구에서 마주친 그 자신의 모습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토록 혐오했던 한심한 '중년아저씨'였던 것.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르며 그는 이렇게 쓴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늙는다는 것은 무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가 직접 찍은 시원한 시칠리아의 풍경사진들이 특유의 감각적인 문장과 어울려 일상인들의 탈출욕구를 한껏 부풀려줄 듯하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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