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빈 강정'으로 드러난 은행들의 기업 옥석가리기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와 달리,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부실을 미리 제거하자는 작업은, 말은 그럴 듯 하지만 해당 기업은 물론 은행에게도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구조조정 장기화의 부작용을 우려하면서 은행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당장은 외견상 문제가 없어 보이는 건설ㆍ조선사들에게 주채권은행의 'C, D 판정'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그래서 최근 기업들은 은행 담당자들에게 생사를 건 로비를 펼쳐왔다.
야간, 휴일을 마다 않고 은행 담당자들의 집까지 찾아 "잘 봐달라"며 읍소하는 건 예사. 중견 A 건설사 관계자는 "주채권은행이 선정한 회계법인 회계사들과도 친분 쌓기를 시도했다"라고 전했고 B사 임원은 "점수를 1점이라도 올리기 위해 미분양분 판매계획을 치밀하게 재작성 했다"고 말했다.
은행 입장에서도 평소 거래기업을 하루아침에 부실기업으로 판정하는 데 대한 부담은 물론, 판정 후에는 "왜 그런 기업에 대출해 줬냐"는 책임추궁도 두려운 상황. 조선사의 경우는 전남ㆍ경남 등 조선사가 몰린 지방자치단체장들까지 나서 구명압력에 동참하고 있다.
은행들의 눈치보기 역시 한계로 지적된다. 거래 기업을 부실로 판정하는 것 자체가 은행의 부실여신이 늘어났음을 선전하는 꼴이기 때문. 특히 이번 평가에서는 일부 은행들이 거래기업 모두를 B등급 이상으로 결정하면서 나머지 은행들도 2, 3점 차이로 C등급으로 분류된 업체를 B등급으로 일부 상향조정한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종 선정은 다음주 채권단 협의와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를 거쳐야 하는 만큼 주채권은행이 미리 나서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여기에 퇴출을 결정짓는 기준에서 비재무적 항목이 60%를 차지하는 점도, 투명한 기준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은행들의 자의적 판단이나 로비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를 넓히는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작업의 구조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외환위기 당시처럼 쓰러져가는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확실히 보이지 않는 부실 가능성을 재단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가 이미 경험한 구조조정처럼 생각하지만 이번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지나친 장기화는 오히려 업계 전체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많다. 은행들이 업계 전체에 채무연장이나 신규대출을 꺼리면서 건설업체들의 경우, 이미 분양한 아파트 중도금마저 등급판정 결과를 보고 내겠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전효찬 수석연구원은 "구조조정은 이번 판정으로 끝이 아니라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며 "차츰 대상도 넓히고 정부 또한 주저하는 은행에게 적절한 당근을 제시하며 보다 적극적인 결단을 유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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