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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4> 뉴델리 영화제서 '태'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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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4> 뉴델리 영화제서 '태' 초청…

입력
2009.01.19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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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뉴델리 영화제에서 <태> 를 초청하였다. 인도는 오래 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인도행을 결심했다. 중앙정보부에서 특별정신교육도 받았다. 인도가 외교상 한국보다 북한에 더 가까운 국가여서 주의사항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화제에 북한대표단이 참석한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자 그들과의 교류를 금지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졌다.

1987년 1월 17일. 주최 측에서 보낸 티켓으로 ‘에어 인디아’를 홍콩에서 갈아탔다. 기내에는 거의 인도인들이었다. 일찍이 홍콩에서 인도인들과 생활을 한 적이 있어서 가까운 친구들을 만난 기분으로 6시간의 비행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작자 신분으로 동행한 아내도 기내에서 제공되는 인도 음식에 아주 만족해 했다.

비행기는 남지나반도를 지나며 몹시 흔들렸다. 천둥번개가 창 밖에서 무섭게 번쩍였다. 분위기가 그래서 였을까. 아내는 승객 중 몇 사람이 북한 사람 같다며 불안해 했다. 나는 그들이 북한 대표단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국제영화제에서 낯을 익힌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곤 했었다. 나는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만 해뒀다. 내가 그들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면 그녀의 이번 여행은 공포로 망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뉴델리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새벽 3시. 창밖은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도에서 가장 큰 뉴델리 국제공항인데도 활주로의 안개등만 드문드문 보일 뿐 작은 비행기 두 대가 격납고 근처에서 곤히 잠들고 있었다. 입국 수속장도 거의 비어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인도청년이 유창한 한국말을 하며 다가왔다. 영화제에서 우리를 영접하러 나온 사람이라고 하였다. 수행을 하게 되어 영광이라며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자동차가 안개 속을 1시간 이상 달렸다. 아내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혹시 우리를 북한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 아니냐고 귓속말을 했다.

나도 은근히 불안해져 행선지를 물었다. 인도 청년이 우리가 불편해 하는 기색을 눈치 채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유학한 적이 있으며 한국정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특별히 영화제에서 자기를 고용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인도의 풍경이 겨우 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화제는 인도 국경일에 맞추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인도는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제작하는 나라다. 연간 제작 편수가 1000편이 넘는다. 영국의 지배 탓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영화를 받아들였고 ‘샤트야지트 레이’ 같은 세계적인 감독을 배출하기도 했다. 영화제는 인도를 지배하는 부호들이 이끌었다. 대개가 유럽에서 영화를 공부한 유학파들이었다. 서울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데 그곳은 한국 초여름 날씨였다.

극장은 넓은 강당 같았다. 적은 돈으로 영화도 보고 쉬기도 하고 자기도 하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영화제측은 우리에게 최고의 호텔을 제공하였다. 그야말로 궁전이었다. 우리 부부는 어마어마한 호텔의 위용에 눌려 자는 둥 마는 둥 첫 날 밤을 꼬박 새웠다. 타월 하나를 덮고 강가나 그늘에 누워 잠들어 있던 인도 사람들이 자꾸 오버랩 되었다. 매일 밤 부호들의 저택에서 초대가 이어졌다. 마치 페르시아 궁전에 온 기분이었다.

우리는 인도의 땅을 밟으며 많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줏빛 흙.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사람들의 얼굴. 수많은 유적. 그런데 그런 것들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문득 안개와 땅의 열기 속에 가려져 있던 성곽이며 건물이며 사람들이 꿈틀 꿈틀 일어나는 착각을 일으키곤 했다. 당시만 해도 인도는 죽은 대륙 취급을 받았다.

과연 그럴까.‘아니다. 잠시 잠들어있을 뿐이다.’ 나는 인도와 인도인들에게서 그것을 확인하였다. 파란만장의 역사 속에서도 세계 문명을 일구어냈던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20년 후의 지금, 그들은 CHINDIA로 대변되는 세계 경제의 미래가 되었다.

당시에는 물론 그렇지 못했다. 거리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가 타고 있는 차를 세우며, ‘루삐!’를 외쳐댔다. 내가 차를 세우라고 하자 수행하던 통역관이 일상적인 일이라며 만류하였다. 영화제 측은 우리에게 별도로 승용차와 1,000달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도 마음에 걸렸다. 내가 그들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 너무도 미안했다. 나는 받은 1,000달러를 그들 모두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장총을 들고 저지하는 경찰들 사이로 그들에게 모든 돈을 돌려준 후, 비로소 내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옆의 수행원이 투덜거렸다. “인뎬?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도가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을 가까이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전하는 그들의 눈빛과 뜨거운 숨소리가 노도와 같이 내 앞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영화제에서 내 영화 <태> 상영을 마치고 바로 북한 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제 측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 비상구로 안내했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가서 북한 영화를 북한 영화인들과 함께 보았다. 귀국하여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혼이 나더라도 그러고 싶었다. 어차피 세상은 하나였다. 내 마음이 인도처럼 거대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그 곳을 떠나던 날. 또 비행기 출발이 늦춰졌다. 저녁 6시 출발 비행기가 12시가 넘어도 떠날 준비를 하지 않았다. 로비 한 구석 ‘듀티프리숍’에 들어갔다. 50평 정도의 작은 규모. 안내원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발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한 청년이 바닥에서 자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아이쇼핑’하는 거라며 그냥 자라고 하였는데 청년이 옆으로 따라 붙었다. 그러더니 내가 관심을 보이는 물건마다 포장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주머니에서 ‘50달러’짜리 한 장을 보이고 이것 밖에 없다며 작은 그림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점원은 ‘다 가지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하며 나에게 한 보따리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내가 눈이 동그래져 아내를 돌아보았다. 아내도 당황해 하였다.

이때 홍콩행 승객은 탑승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점원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어서 가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가 안겨준 물건을 들고 급히 활주로로 나섰다. 그가 커튼을 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나는 책상 위에 그가 준 그림을 바꿔 걸며 속삭인다. ‘꿈’과 ‘열정’과 ‘순수’만 있다면 어디든 낙원이라고...

“아직,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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