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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소박한 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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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소박한 가훈

입력
2009.01.1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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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엔 한해를 마감하며 남는 회한으로, 연초엔 작심삼일(作心三日)용 생활계획표를 짜는 일로 세월을 소진하고 싶진 않았다. 해서 작년 연말에 2009년 신년계획을 세우고 바로 새해 모드로 들어갔다.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나태해졌다고 실망하지 않을. 지킬 수 있는 소박한 계획들이었다. 그러자 정말 연말을 보내는 마음이 아쉽지도, 새해를 맞이하는 몸이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또한 말로써 말하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것과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나열하기 보다는 작은 것부터 이루어나가는 성취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야 대표들이 다난흥방(多難興邦), 상창난기(上蒼難欺), 분붕이석(分崩離析), 풍운지회(風雲之會), 석전우경(石田牛耕)과 같이 저마다 유식해 보이는 사자성어로 된 신년사를 발표할 때 우리는 매일 매일 지킬 수 있는 소박하고 상식적인 가훈(家訓)을 만들었다.

우리 집의 가훈은 "신발은 가지런히 안을 향해 벗어 놓자"이다.

신발은 배우자 부모 자식과 같은 인연과 신분, 재산 등을 상징하는 귀한 물건으로 해석된다. '새 신을 사주면 도망을 간다'는 얘기나 '남자가 군대 가면 여자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등 출처가 분명치 않은 얘기들이 있지만 신발이란 중요한 것임이 분명하다. 나이 지긋한 분들께 듣는 얘기로는 '노인이 돌아가시기 삼년 전부터는 신발이 어지러워진다'는 말도 있다.

이 신발은 안을 향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 옛 풍속화들을 봐도 신은 안을 향해 가지런히 놓여있다. 상서로운 기운. 즉 복(福)을 안으로 끌어당기기 위함이다. 그러나 요즘 식당에서는 손님들의 신발을 바깥을 향해 놓는다. 손님의 편의성도 생각해서이겠지만 '얼른 먹고 얼른 나가 주십사'하는 이야기도 된다. 그래야 더 많은 손님이 들어 올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제집에서 만큼은 신발을 가지런히 안을 향해 놓는 것이 본래 우리의 문화이다.

아빠 구두 엄마 구두를 번갈아 신고 현관의 거울 앞에서 앙증맞게 포즈를 잡거나 신발 정리 놀이를 하던 딸아이의 신발이 요즘 들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종종 엄마 아빠의 신발이 가지런하지 않아 따라 그런 것이 아닐까 반성이 들었다. 친정어머니도 현관은 그 집의 얼굴이라고 하셨는데, 자칫 산만하고 성미 급한 아이로 만드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그리하여 올해 우리 집 가훈의 주제가 신발이 된 것이다.

일본의 어느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너무나 우수한 성적과 모범을 보여 이 학급을 취재하였더니 급훈(級訓)이 "자리를 뜰 때는 의자를 바로 넣을 것"이었다고 한다. 이 역시 너무나 소박한 얘기이지만 뜻을 세우기 전에 마음과 행동을 반듯하게 하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임이 틀림없다. 재미있는 급훈으로는 "30분 더 공부하면 내 남편 직업이 바뀐다"는 어느 여고의 씁쓸하나 웃음이 나오는 급훈도 있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다"처럼 재치 있는 급훈도 있다.

가훈을 어려운 한자성어로 반드시 써야 할 필요는 없다. 각 가정에서 꼭 지켜야 할 적합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놓는 것도 좋다. 나는 어린 자식이 쉽게 이해하고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실천해 볼 수 있는 살아있는 가훈이 지금 우리 가정에 꼭 필요한 가훈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은 평범한 것 같지만 아이는 커서 신발을 반듯하게 놓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깨달아 갈 것이라 믿는다. 그때가 오면 또 다시 새로운 가훈을 만들 것이다. 쉽고 실천이 가능한 것으로.

안진의 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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