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 국회 시절인 1964년 봄. 야당의 김준연 의원이 본회의에서 공화당 정권이 한일협정 협상과정에서 1억3,000만 달러를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정국이 발칵 뒤집혔고, 공화당 출신 이효상 국회의장은 회기 마지막 날 김 의원 구속동의안을 전격 상정했다. 야당 초선 김대중 의원이 의사진행발언에 나섰다.
발언은 회기 마감인 오후 6시를 넘겨 5시간19분이나 이어졌고, 구속동의안 처리는 무산됐다. 헌정사상 본회의 발언 최장 기록은 1969년 박한상 의원의 3선개헌 반대 발언 10시간 5분이다. 그러나 DJ의 의사진행방해 기록이 늘 먼저 꼽히는 이유는 성공한 의사진행 방해였기 때문이다.
■ 의사진행 방해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뜻하는 필리버스터는 해적 또는 약탈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필리부스테로에서 유래했다. 그 근원은 네덜란드어라고 한다. 다수파의 전횡에 맞서 소수파의 의견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인 필리버스터는 미국 상원에서 흔히 활용된다. 버락 오마바 미 대통령 당선인도 저서 <담대한 희망> 에서 필리버스터를 "다수의 횡포 위험을 차단하는 방화벽 구실을 한다"고 긍정 평가했다. 일본 의회의 시간 끌기 우보(牛步)전술도 필리버스터의 일종이다. 담대한>
■ 미국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는 신출내기 상원 의원이 24시간이 넘는 필리버스터로 미 상원의 거대한 부패와 타락에 맞선다는 줄거리다. 그러나 필리버스터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바마는 같은 책에서 필리버스터의 어두운 역사도 언급한다. 보수적인 미국 남부 출신 상원들이 한 세기동안이나 흑인 차별 개선을 저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1957년 24시간18분의 발언으로 민권법 통과를 지연시켜 미 의회사상 최고기록을 세운 스트롬 써먼드 상원의원도 이 경우에 속한다. 스미스씨>
■ 미국이 상ㆍ하원에서 다 허용되던 필리버스터를 상원에 국한하고,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토론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은 필리버스터 남용 방지 장치다. 우리 국회는 아예 의원의 의사진행 발언을 15분 이내로 하고, 동일의제 발언은 2건으로 제한해 사실상 필리버스터를 원천봉쇄하고 있다.
국회에서 소수파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한 유신시대의 산물이다. 연말연초 의사당 폭력사태를 부른 1차 입법전쟁의 반성 위에 필리버스터 부활 논의가 일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다수결과 소수의견 존중이라는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살리기 위한 정치권의 치열한 고민과 논의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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