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은 실용성을 중시한다. 사법 절차에서도 그러하다. 배심제 등으로 인해 돈과 시간이 많이 들 수도 있는 재판을 피해 재판 전에 이루어지는 소송외적인 대안적 분쟁해결 수단, 즉 조정 중재 화해 등을 통해 대부분의 사건이 법정에 가기 전에 해결된다. 이때 조정이나 중재의 결과는 실체적 진실이 아닌 경우도 많다. '소송으로 인한 고비용 회피'라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는 적당한 타협으로 분쟁을 끝내는 것이다.
국민의 법감정, 미국과 달라
우리도 법원이 중심이 되어 이러한 대안적 분쟁해결 절차의 도입에 적극 나섰지만 실패했다. 오히려 법원에 접수되는 사건 수가 폭증하는 추세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미국인들과 우리 국민의 법감정이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국민은 아무리 돈과 시간이 많이 들더라도 법정에서 법관의 입을 통해 "당신이 옳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하급심은 차치하고 1년에 대법원에 상고 되는 사건수만 약 2만 건이나 되는 현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우리 국민에겐 '실체적 진실 발견'이 곧 사법정의다. 조정 등 대안적 분쟁해결 절차를 통한 타협은 아무리 돈과 시간을 줄여주는 실용적 방법이라 해도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최근 법무부와 검찰이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 제도 등의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대검찰청은 지난 7일 법안까지 만들었다면서 10월 정기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플리바게닝은 미국에서 발달한 제도로, 수사를 통한 유죄 증거의 확보가 어려운 사건에서 검찰 측과 피의자 측이 벌이는 일종의 협상을 말한다.
검찰 측이 혐의 사실보다 가벼운 죄로 기소를 하고 피의자는 이를 시인하여 사건을 조기에 종결하는 제도다. 그래서 유죄협상제 또는 사전형량조정제로 번역한다. 우리 검찰은 사건 관련자의 진술외에는 다른 물증 확보가 어려운 뇌물사건 등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수사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이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해 플리바게닝 제도 도입에 반대한다. 우선 이 제도는 우리 국민의 법감정에 맞지 않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 국민과 달리 '진실 발견'을 곧 '사법정의'로 여기는 우리 국민에게 죄를 둘러싼 검사와 피의자 측의 협상은 일종의 거짓 타협에 불과하다. 밀실 협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검찰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추락시킬 수 있어 검찰을 위해서도 이로울 것이 없는 제도다.
미국과 우리 검찰의 권한이 크게 다른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수사는 경찰이 하고 검찰은 기소만 하는 미국과 달리, 검찰이 기소권외에 수사권과 수사지휘권까지 갖는 우리나라에서는 플리바게닝이 검찰 수사에서 피의자의 자백을 강요하는 제도로 악용될 우려가 크다. 공판중심주의를 지향하는 우리 사법개혁의 전체적 방향에도 역행한다. 적용 범죄와 형량이 공개재판을 통해 법정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검사실에서 피의자와 검사에 의해 타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능력 강화에 힘써야
헌법에 배치되는 측면도 있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국민 입장에서는 헌법이 규정한 무죄추정 원칙에 맞지 않게 진술을 강요 당하고, 헌법이 기본권으로 보장한 '법관의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
수사의 효율성 제고는 수사편의주의에 기인한 플리바게닝제 도입이 아니라, 회계나 금융 등 전문 분야의 수사인력 보강과 과학수사 기법의 개발 등 검찰의 수사능력을 강화하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 우리 검찰은 다른 나라 검찰에는 없는 기소독점권과 기소재량권이라는 막강한 권한들을 갖고 있다. 여기에 플리바게닝제 도입을 통해 유죄 협상권까지 거머쥐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무리 봐도 지나친 욕심이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ㆍ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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