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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스포츠 우리가 뛴다] (4) 돌아온 거인 하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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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스포츠 우리가 뛴다] (4) 돌아온 거인 하승진

입력
2009.01.16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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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4년 전 일이 됐다. 2005년 1월8일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로즈가든.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마이애미 히트의 미국프로농구(NBA) 경기였다. 마이애미의 승리가 굳어진 경기 종료 1분10초 전. 포틀랜드 유니폼을 입은 신장 222㎝의 ‘동양 거인’이 코트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승진(24ㆍ전주 KCC)이 한국인 최초로 NBA 무대에 서는 순간이었다.

하승진이 NBA에서 역사적인 첫 득점을 올릴 때까지는 두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2005년 3월13일 멤피스 그리즐리스전. 하승진은 경기 종료 52초를 앞두고 코트를 밟은 뒤 종료 15초 전 레이업슛으로 첫 득점을 기록했다.

하승진은 아직도 4년 전 겨울을 잊을 수가 없다. 거인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온 하승진. 그에게 NBA는 흔들리는 자신을 굳건하게 지탱해준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시즌 동안 46경기를 뛴 하승진은 경기당 평균 1.5점 1.5리바운드를 기록하고 너무나 짧았던 ‘꿈’을 접었다.

그러나 ‘꿈’을 접은 하승진은 한국프로농구의 ‘꿈’이 되어 화려하게 국내에 복귀했다. 200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전주 KCC에 지명된 하승진은 프로농구에 거대한 파장을 불러왔다. 222㎝의 거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인선수 신장제한은 철폐됐다. 각 팀은 시즌에 앞서 하승진 봉쇄방법에 골몰했다. 신선우 전 LG 감독은 “이제 춘추전국시대는 끝났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하승진 쓰나미’였다.

국내 무대에서 신고식을 치른 지 두 달 여. 그러나 하승진의 성적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21경기에 출전한 하승진의 출전시간은 채 20분이 안 된다. 경기당 평균 8점에 7.3리바운드라는 평범한 수치에 소속팀 KCC는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다.

스피드와 자유투라는 치명적인 약점은 하승진의 발목을 잡았다. 느린 공수전환은 KCC 수비의 구멍이 됐다. 75개를 던져 단 24개만 성공시킨 자유투(성공률 32%)로 인해 하승진은 승부를 결정짓는 4쿼터에 벤치만 지키고 있다. 설상가상 발가락이 부러지면서 하승진은 이달 말까지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지만 하승진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소띠’ 하승진은 기축년 새해를 화려한 부활의 무대로 삼을 생각이다. KCC의 부진 탈출은 물론,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해야 한다. 하승진은 김민수(27) 김태술(25ㆍ이상 SK) 오세근(22ㆍ중앙대) 김진수(20ㆍ미 메릴랜드대) 등과 함께 한국농구의 세대교체를 이끄는 중심 축이다.

동부 전창진 감독은 “하승진이 잘 돼야 한국농구가 발전한다. 의도적으로라도 하승진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며 하승진의 선전을 기원했다. 최근 KCC를 떠나 전자랜드 유니폼을 입은 서장훈은 시즌 개막 전 “승진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NBA로 돌아가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마음을 강하게 먹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승진은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다. 제 기량을 다 보여주지 못해 감독님과 팬들에 미안할 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하승진은 “빨리 부상에서 회복해 경기에 출전하고 싶다. 올해는 기량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좀더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굳은 각오를 밝혔다.

허재원 기자 hooa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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